▲출처 = 구글
안노라 ▲‘그림으로 만나는 서양사’인문학 강사▲‘벗에게 가는 길’인문학 공간 대표
안노라 ▲‘그림으로 만나는 서양사’인문학 강사▲‘벗에게 가는 길’인문학 공간 대표

인어는 미스 유니버스의 미모와 마리아 칼라스의 목소리로 거칠지만 외로운 뱃사람들의 벗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말도 통하지 않는 파도와 한 판 승부를 벌이다 지쳐 뱃전에 엎어지면, 인어는 부르르 떨고 있는 이두박근과 대퇴직근을 토닥토닥 다독여 주었습니다. 육지에 배가 닿고 뱃사람들이 그들을 쓰다듬었던 부드러운 손길을 찾을 때, 인어는 따라 나서지 못하는 자신의 꼬리가 못내 서글펐을 것입니다. 인어는 다리가 없으니까요.

  인어는 목소리를 내어주고서야 다리를 얻습니다. 다리가 있다는 건 걸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걷는다는 것은 의지와 방향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머물음’과 ‘떠남’ 사이에 ‘행함’이 있고 동서남북 외에도 ‘마음의 방향’이 있습니다. 인간은 걸음으로써 내면의 파장을 고스란히 다리에 전해줍니다. 결국 자신을 자신에게 데려다 주는 것은 인간의 다리인거지요. 새로운 결심과 의욕으로 다이어리가 꽉 찬 1월, 단단히 대지를 딛고 이제 막 떠나기 시작한 굳센 남자를 소개합니다.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1840~1917)의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압도적이군요. 내딛는 한 발에 온 몸의 근육과 혈관과 뼈들이 호응합니다. 암벽 같은 가슴과 바짝 올라붙은 성기, 보폭이 큰 걸음은 그가 충만한 에너지로 쉬지 않고 걸을 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손가락 끝에 담배를 물고 있는 남자가 아닌, 두툼한 입술로 시거를 씹고 있는 사내임이 틀림없습니다. 허벅지 안으로 구렁이가 틀고 올라가는 듯 힘줄이 팽팽하고 아랫배를 가두는 치골은 성적 긴장으로 충만합니다. 조각의 거친 표면은 걸으면서 그가 내뿜을 열기와 쉰 내나는 땀을 연상시킵니다. 넘치는 활기로 가득 찬 육체에 쉼표나 마침표가 없으니 그는 쉬지 않고 걷겠지요? 그의 다리는 메신저이자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일까요? 앞으로 내디딜 다리를 밀어줄 팔도, 운영할 머리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오로지 솔직담백한 다리만으로 세상을 향해 걷고 있습니다.

  오귀스트 로댕은 파리의 빈민가에서 태어났고 늘 진흙과 놀았습니다. 가난이란 재능의 강력한 적이기도 하지요. 교육이라고는 삼촌이 운영하는 기숙학교와 응용 미술을 가르치는, 요즘의 기술학교가 전부였던 그는 조각을 더 공부하고 싶었지만 은(銀)세공장에서 장신구와 보석을 깎았습니다. 이후 생계를 위해 카리에-뵐레즈 공방에서 조수로 일하기도 하고 틈틈이 살롱 전에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지만 번번이 떨어졌습니다. 방향을 잃은 그는 이탈리아로 떠납니다. 그곳에서 운명처럼 미켈란젤로를 만나지요. 혈관에는 물감이 흐르고, 대리석에서 잠든 신을 망치 하나로 깨운다는 미켈란젤로는 죽은 지 350여 년이 지난 뒤, 로댕의 스승이 됩니다. 프랑스로 돌아온 로댕은 돌과 청동의 말을 이해했습니다. 그가 조각한 인체의 각 부분은 독립된 표정과 언어를 갖고 있었고, 심지어 근육과 피부와 혈관에서도 감정이 드러났습니다. 고대 그리스로부터 이어온 조각이 완벽한 전체였다면 그는 결함과 비루함 속에서도 웃고 슬퍼하는 인간을 개체로 드러내었습니다.

  로댕은 평생을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에 눈멀고 육체의 말에 귀 기울여 그것을 조각으로 표현했습니다. 낡았으나 질긴 과거와 맞서는 관능적이고 율동적인 미래였지요. 뫼동에 있던 로댕의 작업실은 현대조각의 분만실이자 낡은 관습의 수술실이 되었습니다. 그는 100여 년 전 시작했던 위대한 걸음으로 쉬지 않고 우리에게 걸어오고 있습니다. 2020년, 다이어리에 가득 찬 숨 가쁜 희망을 응원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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