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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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노라 ▲‘그림으로 만나는 서양사’인문학 강사▲‘벗에게 가는 길’인문학 공간 대표
안노라 ▲‘그림으로 만나는 서양사’인문학 강사▲‘벗에게 가는 길’인문학 공간 대표

아이들이 춤춥니다. 엉덩이와 다리에는 세상의 난폭함을 훌쩍 뛰어넘는 발랄과 명랑이 있습니다. 터져 나오는 웃음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아이들의 머리가 젖혀졌군요. 오염된 세상에 대한 백신처럼 엄마와 아빠는 아이들 손을 꼭 잡고 있습니다. 욕심이 비껴간 갸름한 얼굴에 가족을 지키려는 순박한 사랑이 넘쳐납니다. 세상은 핵구름으로 그늘졌고 전쟁의 흉터는 산과 들에 깊게 패였지만 아이들의 발바닥에는 너나들이 경계가 없습니다. 들짐승, 날짐승처럼 맨 몸으로 뛰어놉니다. 깔깔거리는 소리가 화면 밖으로 튀어 나옵니다. 말은 버리고 소리만 남긴 캔버스에 한 가족의 꿈이 연시(戀詩)처럼 담겨있습니다. 기역 니은을 몰라도 독해 가능한 공통의 언어로 가족의 사랑을 기록한 이중섭(李仲燮, 1916~1956)<춤추는 가족>입니다.

 

그는 한일합방이 이루진 몇 해 뒤, 1916년 평안남도 평원에서 태어났습니다. 친가, 외가 모두 대지주였지요. 충만했던 어린 시절과 일본으로 유학을 갔던 청년기까지 물질적으로 여유로웠고 고통 받는 식민지의 아들로서 민족주의자였습니다. 사과를 먹기 전에 그리기부터 했다는 그는 화풍이 자유로운 일본 도쿄문화학원(분카가쿠엔)을 졸업하고 1943년 귀국합니다. 하지만 일본에 심장 반쪽을 남겨 두었지요. 그는 야마모토 마사코라는 여인을 사랑했습니다. 그녀는 발가락군이라는 애칭에서 이남덕이라는 이름이 되어 원산 광석동 너른 마당에서 1945년 족두리를 씁니다.

 

19506.25 전쟁 발발로 인한 피란(避亂)생활은 극심한 생활고로 이어졌고, 악화된 전세(戰勢)로 반도 끝자락 제주도로 이주하게 됩니다. 그의 가족은 1951년 제주도 서귀포에 1.4평짜리 방을 얻습니다. 그곳은 아, 그곳은 바다가 보이는 곳이었습니다. 바다와 잇닿은 하늘은 상처에 바르는 아까징끼처럼 붉은 색이었다가 게들이 숨구멍을 내놓고 눈치 보는 갯벌처럼 검푸른 색이 엎치락뒤치락 했습니다. 이중섭은 배고프고 눈 맑은 두 아이 태현, 태성이와 게를 잡았습니다. 잡아먹은 게에게 미안해 게 그림을 그렸지요. 게와 아이들은 생태계 안에서 평화로웠고 그 때가 이중섭에게는 가장 행복하던 때였습니다. 1952년 지독한 가난으로 아내와 아이들을 일본으로 떠나보냅니다. 하지만 잠시의 헤어짐은 영원한 이별이 되었습니다. 그는 가족을 만나기 위한 무리한 작업, 극심한 영양실조, 전시회 실패로 인한 절망으로 몸과 마음이 부서졌습니다. 그는 적십자 병원에 행려병자가 되어 간염으로 사망합니다.

 

이중섭에게 있어 가족ㄱㅏㅈㅗㄱ이거나 ’,‘으로 분절할 수 없는 하나의 덩어리였습니다. 조각조각이 모여 전체를 이룬 것이 아니라 전체를 복사한 일부가 조각이 되었다고 할까요. 그런 의미에서 가족과 분리된 자신은 존재할 수 없었지요. 가족의 구성원인 아내와 두 아들을 자신처럼, 아니 자신 이상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는 소박하다 못해 너무나 평범한 꿈, 가족과 같은 공간, 같은 시간을 나누길 소망했지요. 누구나 누리는 그 단순한 행복이 그에겐 평생의 꿈이었고 보다 빨리 죽음에 이르게 한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가족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불구의 시대를 보듬은 그는 마지막 낭만가객(浪漫歌客)이었습니다. 그늘진 현실을 양지바른 쪽에 내어 말렸고 어두운 현재를 기록하면서도 가능한 밝은 색을 골랐습니다. 그의 그림은 희망으로 따사롭고 따스한 그 온도는 아직도 응달에 있는 우리의 얼굴을 감싸 줍니다.

 

며칠 있으면 설날이 돌아옵니다. 설날에는 온 가족이 모이지요. 가까운 이웃나라는 일일생활권이 되었고 핸드폰은 지구의 끝에 있어도 옆에 있는 듯 얼굴의 주름까지 보여줍니다. 그런데도 가족이 모이는 것은 더욱 어려워진 듯합니다. 온 가족이 모이는 설날, 얼굴과 얼굴을 부비고, 손과 손을 잡고, 눈과 눈을 마주쳐 이렇게 인사하면 좋겠습니다. “보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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