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한정규
문학평론가 한정규

일제는 1923년에 식민지국민인 우리청소년 중 18세 이하 8세까지 부랑아, 거지, 고아들을 붙잡아 수용했다.


산업기술을 가르쳐 산업 전사로 육성시키겠다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 조선감화령을 제정한 뒤 함경남도 원산에 영흥감화원을 세우고 1938년엔 전남 신안군 고하도에 목포감화원을, 1942년 5월 엔 경기도 안산시 선감도에 선감도감화원을 세웠다.
선감도감화원에서는 서울과 경기 등을 떠도는 부랑아와 고아 등 400여명을 강제수용 해 노역을 시켰다.


먹을 것을 제대로 주지 않아 영양실조로 병들게 하고 심한 구타로 많은 청소년을 죽게 했다. 수용된 청소년들은 그곳을 탈출하려다 바다에 빠져 죽기도 했다.
일제는 그들이 ‘부랑아’나 ‘거지’라며 산업기술을 가르쳐 준다고 했지만 그것은 하나의 명분일 뿐 거짓이었다.
거짓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 1941년 12월 일제가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전쟁을 선포하고 이후 치열한 전쟁 중에 그들이 식민지 국민을 위해 산업기술교육을 시킬 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그들이 말했던 것과 같이 감화원에 수용된 청소년 모두가 단순 부랑아나 거지가 아니라 그 중에는 독립만세시위에 가담한 투사도 적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되는 부분이다.


선감도 감화원에 대한 전말을 살펴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선감도감화원 원생들에 대한 이야기 배경에는 이하라 히로미츠라는 무명작가가 쓴 소설로부터 유추됐다.
게다가 독립이 된 이후인 1946년부터 우리정부가 1982년까지 당시시설을 선감학원으로 운영했다.
그 때를 배경으로 선감도감화원을 평가 하는 가운데 잘 못 됐다.
소설을 쓴 이하라 히로미츠는 당시 선감도감화원 일본인 직원 아들로 그 무렵 열 살에 불과한 철없는 어린아이였다.
그런 그가 1990년대 후반에 쓴 소설에서 그리고 한국을 방문“당시 수감됐던 원생들이 부랑아와 거지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을 지도하는 과정에서 구타 등 가혹행위가 이뤄졌던 것이며 구타도 한국인이 했던 것이다” 라고 말했다.
마치 일본은 잘 못이 없이 한국인들끼리 행해진 일로 확인된 사실처럼 말 했다.
그가 한 말을 맹목적으로 믿어서는 안 되는데 그가 했던 말과 그가 쓴 소설 속 이야기를 선감도 감화원에 대한 전말처럼 믿고 있다.
2010년 4월 당시 자유선진당 박선영의원이 국회의원회관에서 경술국치 100주년을 맞아 일제하 선감도감화원 진상규명을 위한 ‘어린이 근로정신대를 아십니까?’라는 주제로 정책토론을 했었다.


안타깝게도 그 때 토론은 당시 수감된 소년들의 신분을 밝히는 것 보다는 가혹행위로 희생된 소년들의 죽음과 그런 행위를 한 일제를 비판하는 데 그쳤다.
그 후 선감도감화원 근처에 희생자 위령탑을 건립했다.
그러나 위령탑을 세우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당시 선감원에 수용됐다가 희생된 아이들의 신분과 수감사유를 명확하게 밝혀내야 했다.
그들을 거지나 부랑아로만 인식해서는 안 된다. 또 조선감화령에 의해 설치된 선감도감화원을 선감학원으로 잘 못 이해해서도 안 된다.


선감도감화원을 선감학원으로 칭한 것은 1946년부터 1982년까지 경기도가 운영하면서부터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1946년 이전에 감금 희생된 자들에 대한 경위를 밝혀야 한다는 점이다.
그들 중엔 분명히 독립운동을 하다 거지나 부랑아로 누명을 쓰고 회생 된 원혼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국가가 심도 있게 조사 밝혀내야 한다.


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를 떠돌다 감화원에 구금 빗방울처럼 사라져 버린 그들을 반드시 찾아 내야한다.
선감도감화원 뿐만 아니라 목포감화원과 영흥감화원에서 희생된 원혼들 그들을 계속 방치해선 안 된다.


시화호 서남단 선감도에 그런 역사흔적이 숨 쉬고 있다.
당시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을 하다 거지 또는 부랑아라는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어 잠든 그 흔적이 숨 쉬고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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