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때 공식 문서에 활용되다가 약 130여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조선 국새 ‘대군주보(大君主寶)‘에는 누군지 알 수 없는 이의 이름이 알파벳으로 선명히 새겨져 있다. 사대주의를 청산하고 자주국가임을 상징했던 이 국새에 새겨진 상처 자체가 우리 역사임을 드러낸다.
문화재청은 19일 서울 고궁박물관에서 최근 환수된 국새 대군주보와 ‘효종어보(孝宗御寶)’를 공개했다. 지난해 12월 재미교포 이대수(84·Lee Dae Soo)씨로부터 기증받아 국내로 인도된 유물들이다.
이 가운데 대군주보의 경우 국가의 국권을 상징하는 국새인 만큼 이번 환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국새는 외교문서나 행정문서 등 공문서에 실무용으로 직접 사용되던 도장이며 어보는 의례용으로 사용되던 도장이다.
특히 고종 19년인 1882년에 제작된 대군주보는 조선이 독립된 주권국가임을 상징하는 국새였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더 크다. 그동안 명으로부터 받아 사용하던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이라는 도장을 대체한 용도였던 만큼 중국 중심의 사대적 외교관계를 청산하고 주권국가로의 전환을 시도한 역사적인 측면을 담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해석이다.
전 국사편찬위원장인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1873년 고종이 친정 선언을 하고 1882년 새 국새를 조성했다”며 “이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청국과 1대 1로 통상조약을 맺는 등 중국의 인접국으로서 500년 동안 지속되던 책봉관계를 떨쳤다”고 전했다.
서준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사는 “이 시기 제작된 여섯 과의 외교용 국새 가운데 유일하게 발견된 사례로서 가치가 높다”며 “기존 중국에서 받았던 국새의 보문과 달라진 점은 ‘인(印)’자에서 천자만이 쓸 수 있는 ‘보(寶)’자로 대체됐다는 점”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상징을 지닌 국새임에도 환수된 대군주보에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영문명이 음각으로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점이 역설적으로 눈길을 끈다. ‘W. B. Tom’(W. B. 톰)이라는 글자다.
이 글자가 어디서 어떤 과정에 의해 새겨지게 됐는지는 파악할 수 없는 상황이다. 기증자인 이대수씨가 1990년 후반 미국에서 경매를 통해 매입하기 이전에 이미 새겨져 있었고 1880년대 이후 이 유물이 어떻게 해외로 유출됐는지 과정을 알 수 없는 만큼 그 과정에서 보유하고 있던 이가 이름을 새긴 것으로 추정하는 정도다.
유출 과정도 일제강점기나 6·25전쟁 등을 겪는 동안 어떻게 이뤄졌는지 확인할 수 없다. 다만 6·25전쟁 당시 미군에 대한 출입국 심사를 면제해줬던 협정을 맺은 일이 있었던 만큼 당시에도 여러 점의 국내 문화재들이 유출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정도의 추정을 할 뿐이다.
이번 국새와 어보 2점이 환수되면서 조선시대에 제작된 총 412과의 국새·어보 중 73과가 미환수된 채 남아있게 됐다. 국새의 경우 37과 중 28과가 미환수된 상태이며 어보는 45과가 사라진 상태다. 이에 앞서 최근에는 2017년에 미국과 수사공조를 통해 문정왕후어보와 현종어보를 환수한 바 있다.
지혜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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