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구글 에곤 쉴레-죽음과 소녀
▲출처 = 구글 에곤 쉴레-죽음과 소녀
안노라 ▲‘그림으로 만나는 서양사’인문학 강사▲‘벗에게 가는 길’인문학 공간 대표
안노라 ▲‘그림으로 만나는 서양사’인문학 강사 ▲브런치 작가▲‘벗에게 가는 길’인문학 공간 대표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몹시도 잰 걸음으로 서둘러 떠났지요. 뒤틀리고 일그러진 형태, 음울한 색, 시니컬한 표정, 거부하는 동시에 격렬하게 집착했던 성(), 자긍(自矜)과 자학(自虐) 사이를 오가며 신경질적이던 자아의 허물을 이곳에 두고, 평온한 미래를 갈구하며 빈으로 떠났습니다. 하지만 그가 바라던 안정적인 삶을 보내려고 도착한 역에는 이미 스페인 독감이 먼저 내려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스페인 독감은 그를 쓰러뜨렸고 그의 뛰어나고 독특했던 예술세계도 함께 스러졌습니다. 그가 그토록 바라던 단란하고 구순한 가족은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는 200여 점의 유화와 2,000여점의 드로잉을 남겼습니다.

 

그의 이름은 에곤 쉴레(Egon Schiele, 1890~1918)입니다. 그는 오스트리아 북쪽, 도나우 강변에 있는 도시, 툴린(Tulln)에서 툴린 역 역장을 하던 아돌프 쉴레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손가락으로 연필을 쥘 수 있을 때부터 쉬지 않고 드로잉을 했다고 하지요. 아버지는 그의 스케치 북을 던져버렸지만 그의 여동생 게르티 쉴레는 기꺼이 모델을 서 주곤 했습니다. 그가 15살 때, 아버지는 매독으로 사망합니다. 매독 균으로 인한 정신착란과 발작을 일으키는 아버지의 모습은 그의 작품에서 왜곡되고 거칠게 묘사된 인물의 누드와 작고 쪼그라든 성기로 나타나게 되지요. 다정하지 않은 어머니에 대한 애정결핍과 천재적 재능이 주는 오만한 자아를 갖고 있던 그는 빈 미술아카데미에 입학합니다. 히틀러가 재수 끝에 낙방해 결국 가지 못했던 그 미술아카데미지요. 하지만 이곳은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학풍이 지배적인 곳이었습니다. 그는 고집스러운 교수와 끝내 불화했고, 회의에 빠진 채 학교를 나옵니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구스타프 클림트가 각 세기마다 고유한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 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빈 분리파>를 만들었던 때입니다. 쉴레와 만난 클림트는 그의 비상한 재능과 실력을 인정했습니다, 작품을 구매해 주었고, 예술을 후원하는 후원자들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이때 클림트의 모델이었던 발리 노이질(Wally Neuzil)을 만납니다. 그녀는 17살이었어요.

 

소개한 그림은 노이질을 모델로 한 <죽음과 소녀>입니다. 그녀는 검은 옷을 입은 남자에게 매달립니다. 하지만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그녀의 간구와 애원을 나타내는 팔은 가느다란 뼈만 남았거든요. 전 체중을 실어 그에게 매달려 보지만 그는 몸을 뒤로 뺀 채,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습니다. “이제 그만 헤어져야해.”하고 설득하는 듯이요. 쉴레는 노이질과 4년을 동거했습니다. 노이질은 그의 모델이 되어 주었고, 그의 식사를 준비했으며, 그의 연인이기도 했지요. 쉴레가 어린 소녀를 유괴했다는 혐의로 구금 되었을 때에도 헌신적으로 그를 보살폈습니다. 하지만 쉴레는 1915년 중산층의 얌전하고 미소가 고왔던 에디트 하름스와 결혼합니다. 노이질과 헤어지고 난 뒤, 쉴레는 이별에 대한 마음을 검은 옷의 사내로 표현했지요. 사랑은 죽었다고 말입니다. 노이질은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으로 1차 세계대전의 종군 간호사로 자원했고 전쟁터에서 선홍열로 사망했습니다.

 

1918년 가을, 중세의 흑사병보다 훨씬 많은 사망자 수를 기록한 스페인독감이 빈에 도착했습니다. 미국에서 발병한 스페인 독감은 비행기나 기차를 타지 않고 사람을 숙주로 하여 뚜벅뚜벅 유럽 각지로 퍼져나갔지요. 유럽인구의 1/3이 독감에 걸렸습니다. 철저히 언론을 검열했던 1차 세계대전 중이었기에 독감의 무시무시한 위력은 정확히 알려지지 못했습니다. 1차 대전 시, 유럽의 전쟁터에서 사망한 인원은 1,500만 명 정도이지만 스페인 독감은 최소 2,500만에서 1억 명까지로 추산합니다. 스페인 독감이 문을 두드렸을 때, 쉴레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던 에디트가 맞이했습니다. 어떠한 방책도 없이 그녀는 허망하게 스러졌지요, 옆에서 간호하던 쉴레는 에디트가 죽고 난 3일 뒤, 그녀를 따라 갔습니다. 혼란과 도취에 빠져 있던 시절, 그의 감정과 재능은 무분별하게 대출 되었고 그의 짧은 시간은 그것을 회수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돌아오지 않았지요. 노이질에게도, 에디트에게도, 표현주의를 성숙시키려 했던 작가들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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