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한정규
문학평론가 한정규

정의가 곧 질서다.
정의가 상실한 사회는 범죄의 소굴이 된다. 정의를 중시하지 않는 인간은 인간으로서 가치가 없다. 국가 또한 같다.
그런데 요즘?
비둘기 갈매기 들개 하이에나 사자 그런 야생동물도 홀로 살지 않고 자기들끼리 집단을 이루어 서로 의지하며 산다.


그들은 사냥도 함께한다. 질서를 위해 엄격한 서열도 있다. 그리고 철저하게 지킨다. 그게 모두 정의라는 하나의 큰 틀에서 이루어진 질서다.
정의가 무너지는 순간 질서는 깨지고 또 다른 힘에 의한 지배가 시작된다. 힘에 의한 지배는 오직 복종뿐이고 논리라는 것이 필요 없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인격이자 자유라는 권리이다.
그 인격과 자유를 지켜주는 것이 정의다.


사람들 중에는 그런 정의를 무시하고 오직 자기만을 위한 정의를 내세운 경우가 많다.
그들에게는 도덕이나 법 같은 것 존재하지 않는다. 정의가 실종된 그들에게는 똑같은 경우라도 코에 걸면 코 걸이자 귀에 걸면 귀걸이로 코걸이귀걸이다.
내가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윤으로 내로남불이다.


그런 사람에겐 정의가 따로 없이 자기생각이 곧 정의다. 그런 정의는 독재자나 가능하다. 도둑이 도둑이라 하지 않듯 독재자가 독재자라 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일수록 자신이 가장 민주적이라 한다.
1938년 일본이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놓고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지지배를 하면서 젊은 여성들은 일본군위안부로, 우리 젊은이들은 군대로, 나이가 많은 남자들은 군수품제조공장근로자로 강제 동원 인권을 유린했었음이 명백한데도 그런 과거사를 덮고 위안부는 매춘부로 성매매를 위해서였으며 군수품제조공장근로자는 돈을 벌기위해 스스로 선택했던 일로 비하 그게 정의라 주장한다.
그런 경우는 일본이 무어라 변명해도 정의로운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일본이 힘으로서 다른 나라를 침략 저지른 만행으로 정의라 할 수 없다.


그 같이 정의를 왜곡하는 경우가 정치지도자들 중에 종종 볼 수 있다.
멕시코의 혁명가이자 정치지도자였던 판초빌라가 혁명을 하면서 가진 자에게서 재산과 권력을 빼앗기 위해 절도 강도 그리고 사람을 죽였다.
그래서 재산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혁명에 성공했다.
그 훗날 옛 애인을 만나 자기가 했던 행위를 놓고 잘 했었다고 자랑을, 그러자 옛 애인이 그런 행위는 정의롭지 못한 나쁜 짓이다 며 나는 당신 같은 그런 나쁜 사람은 대통령이라 해도 모른다며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 나 가버렸다 한다.


그 여인 말마따나 좋은 일을 하기위해 불가피했다 하더라도 사람을 죽이고 남의 물건을 빼앗은 것은 수단과 방법이 정당하지 못한 일로 그것은 정의가 아니다. 
지탄받아 마땅하다.
그런 정의롭지 못한 일 비단 판초빌라 뿐만이 아니다.
우리나라도 그 같은 일 부지기수다. 국민이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하도록 한 권한을 사적인 일로 활용 재물을 탐내고 불법 부당한 행위 그것도 가족 일가친척 모두가 함께 범죄선상에 오르내린 그런 일 자주 아주 자주 일어나 이 사회를 혼란에 빠뜨렸다.
그게 모두 정의가 실종 된 결과다.


정의는 모두를 위해 존재돼야 한다. 정의롭지 못한 행위는 근절돼야 한다.
정의는 지식인 그리고 권력과 재물을 많이 가진 자에게 더욱 필요한 부분이다. 한마디로 정의로운 사회가 가장 민주적인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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