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영 現 Music director 및 organist, pianist前 한인방송국 MCTV, WIN TV, MBC Chicago 아나운서 및 뉴스 앵커
조희영 現 Music director 및 organist, pianist前 한인방송국 MCTV, WIN TV, MBC Chicago 아나운서 및 뉴스 앵커

미국에 사는 필자는 며칠 전 동네 길에서 운전하고 있었다. 속도가 제한된 도로 옆에 위치한 집 앞마당에서, 풍선으로 장식한  “Happy Birthday”라는 배너와 함께  많은 사람들이 마스크를 쓴 채 서로 어울리며 즐기고 있었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정부의 방침을 깡그리 무시하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저 사람들 정신이 있는 거 맞아?”라는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텁텁한 기분은 덤이었다.

‘코로나19 펜데믹’이라는 현실 앞에서 사람들의 행태는 다종다양하다. 경미한 접촉에도 혹여 병에 걸릴까 전전긍긍해하던 사람들에겐 ‘낯선’ 행동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헛기침’과 ‘재채기’와 같은 소소한 일상적 행동에서도 타인의 시선을 더 의식하고, 서로에 대한 도덕적 판단의 기준을 엄격하게 들이댄다. 자택격리라는 환경적 충격과 전염병 공포 아래에 놓인 사람들은 자연스레 자기방어기제라는  옷을 입고 ‘집콕’ 생활에 익숙해지고 있다. 사람들에겐 외부와의 단절로 인한 외로움과 심리적 고통이라는 소위 ‘코로나 블루’ 해소에 대한 욕망은 점점 커져만 간다.

사실 ‘사람사이’를 뜻하는 인간(人間)은 집단을 이루며 살아가는 사회적 동물이다. 홀로 있기보다는 여럿이 함께 하면서 사회적, 심리적 안정감을 찾는 본능을 갖고 있다. 마스크를 쓴 채 한 손에 술병을 들고 사람들과 대화하는 파티 속은 답답해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코로나로 강제 격리된 일상에서 간만에 일탈을 느끼는 듯했다.

이렇게 사람들은 현재 코로나 위기 상황 속에서 자가 격리라는 자기방어기제를 유지하면서도, 사회적 접촉의 통로를 찾으면서 결핍된 욕망을 채워나간다. 그렇다면 코로나 상황에서 요청되는 비대면(un-tact)의 일상화인 ‘사회적 거리두기’는 사람들의 개인적, 사회적 본능을 억압하는 사회적‧법적 장치일 뿐이라고 생각해야 하는가.

‘사회적 거리두기’에 따른 피로감이 풍선처럼 커지고 있다. 미국 현지에서는 경제활동 재개를 요청하는 시위가 복수의 주에서 이어지고 있다. 가정에서는 자녀들의 온라인 교육을 ‘감시’하는 부모들의 피로가 누적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이제 ‘사회적 거리두기’에서 ‘생활 방역’으로의 전환이 현실화되고 있다.

하지만 ‘싱가포르 사태’, ‘이태원 집단 감염 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사회적 거리두기에 대한 피로감 때문에 ‘거리두기’의 완화 혹은 해체라는 ‘물리적’ 처방에만 기대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은 마스크 착용이나 생활 방역의 전환, 그리고 경제 재개의 압박을 넘어선  사회적∙윤리적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시기이기 떄문이다.

코로나 19에 당면한 위험 앞에서 ‘억눌린’ 개인적‧집단적 요구와 사회적‧법적 장치의 필요성을 간과하자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던지는 ‘어떤 세계에 살아가며 어떤 세계를 만들어야 할 것인가’라는 윤리적 질문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같이 살기’의 다른 이름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사람들의 개인적, 사회적 본능을 억압하는 사회적‧법적 장치 이상의 의미가 있다. ‘거리두기’는 나와 너의 공통기반에 대한 환기이자 사회적 공생과 연대를 호명하는 윤리적 물음인 셈이다.

우리는 앞으로 어떤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 물음은 코로나로 인한 전 세계적인 위기 앞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윤리적 방향과 존재방식에 대한 성찰을 요구한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나와 너를 소외시키는 개인적‧집단적 자기위무적인 욕망에 저항하며, 사회적 신뢰와 공동체성을 새롭게 세우는 과정이다. 결국 ‘같이 살기’이자 ‘더불어 살기’ 아니겠는가.

조희영
現 Music director 및 organist, pianist
前 한인방송국 MCTV, WIN TV, MBC Chicago 아나운서 및 뉴스 앵커

 

정석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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