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돌기
 
김선진 시인

 
그리움은 나의 피돌기
이것만은 멈출 수 없어
이것만은 감출 수 없어
평생이라 부르는 굴곡진 그 길을
타박타박 걸어왔어요
 
퍼올려도 퍼올려도
자꾸만 고여오는 우물물처럼
그리움의 피톨은 잘 돌아갑니다
 
노쇠한 육신 볼품없어도
닳아지지도 않아
사라지지도 않아
 
어느 날 갑자기
어디든 솟구치는 분수처럼
물꼬를 튼다면
 
그래서 오늘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작의 단추를 풀지 않습니다

 
삶은 고달프다. 오죽하면 벗어나려는 몸부림에 수도원이나 초야에 파묻혀 모든 것을 잊고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참선에 들겠는가. 또한 일찍 깨달은 성자의 종교에 귀의하여 삶의 고난을 잊으려 열중한다. 하지만 잊을 수도 버릴 수도 없다. 오죽하면 죽음 앞에서만이 철든다는 말이 있을까. 그런 삶 속에 사람이 가장 크게 발휘하는 힘이 희망이며 그 희망의 힘으로 삶이 유지된다. 그런데 희망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리움이다. 영달을 위하여, 배고픔을 벗어나려, 나누기 위하여 등 사람에게는 무수히 많은 바람이 있고 그것은 커다란 그리움으로 차지하여 삶의 기본이 된다. 김선진 시인도 마찬가지다. 젊음이 지나고 삶의 끄트머리에 서서 여태까지 살아온 힘이 무엇일까를 떠올린다. 그것은 그리움의 피돌기다. 퍼올려도 퍼올려도 끝없이 솟아나는 우물물처럼 그리움의 피돌기가 멈추지 않아 노쇠한 육신을 떠받친다는 고백은 모든 사람을 대신하는 참된 고백이다. 그러나 자신에게만 있는 그리움이 아니라 온 세상 어느 곳에나 퍼져나가는 구원의 그리움이다. 시인의 심성이 한 편의 작품으로 잘 드러나 읽는 이의 감성을 감동으로 이끈다.

 
 갈망을 새기다
 
이솔 시인

 
아무렇게나 생긴 돌멩이
다듬지 않아도
바람과 비에 씻긴 그대로 좋았다
 
구르는 대로 굴러가고
파묻히면 숨 참아내고
드러내지 못하는 부서지는 몸짓
모난 대로 둥근 대로
견고한 속 은밀한 이야기를
살갗에 줄무늬로 그려내는 지층으로
억겁을 견딘 찰나를
못난 돌멩이의 갈망을 새겨 간다

 
아름다움의 기준은 자연에 없다. 그러나 창조물은 다르다. 성경의 말씀에 조물주가 우주의 모든 만물을 일주일 동안 창조하고 보기에 좋았다고 한 것을 보면 무엇인가를 만들어낸 존재는 자기의 만족을 이룬 것에 대한 의미를 크게 둔다. 인간도 마찬가지로 자신이 만든 예술품이나 생활용품 등에 대한 만족감으로 아름답고 큰 가치가 있다고 자부심을 느낀다. 없는 것을 만든 것에 대한 만족감이다. 그러나 자연 속에 존재하는 것이 참으로 더 아름답게 보이는 게 있다. 그것은 절묘하게 그 자리의 빈 곳을 채우고 조화롭게 자리를 잡고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을 느끼게 한다. 이솔 시인이 본 돌멩이도 마찬가지다. 모든 만물은 원한다. 자신의 존재 가치가 누구에게나 인식되기를 바란다. 아무 쓸모가 없을 것 같은 돌멩이가 자신을 빛내기 위하여 억겁의 세월 속에 자신을 갈고닦아 자신의 빛으로 가치를 인정받기를 바란다. 시인 자신을 돌멩이로 그려낸 이중구조의 묘수를 찾은 것이다. 자연 속에 가만히 있어도 아름답게 빛나는 돌멩이에서 시인 자신의 갈망을 그려 화자의 순수한 감정을 솔직하게 그렸다.         -이오장(시인)


바다는
 
조영희 시인

 
눈물이 많아 바다가 된
눈물이 짓닳아 짠물이 된
바다는
밤낮 없이 울어대는 파도 소리를
먹고산다
바윗돌 걸려 철썩철썩 치대며
가슴 치는 소리도 꿀꺽꿀꺽 삼킨다
길을 잃고 지나가는 바람의 소리도
대신 울어 주며
쏴쏴 가슴을 쓸어내린다
 
바다는
그 넓은 가슴이
파랗게 하늘을 닮았다

 
태초에 화산 폭발로 솟아난 바위산이 너럭바위가 되어 많은 생물의 자리가 되기까지는 억겁의 시간을 지나야 가능하다. 그 위를 흐르는 물이 골을 만들어 파고 들다가 많은 물이 흐르는 강물이 되기까지는 수만 년이 필요하다. 바다는 고통에 일그러져 흘린 눈물을 전부 받아냈으나 고난과 슬픔의 눈물까지도 머금어야 했다. 스스로의 움직임에 파도를 만들어 철썩철썩 어딘가에 부딪히는 소리로 자신을 일깨워 자학의 채찍질을 한다. 모든 것을 받아내어 그만큼의 크기로 대신 울어주는 바다, 조영희 시인은 그러한 바다를 보고 바다보다 큰 어떤 존재를 생각한다. 어머니다. 어머니는 어느 것에도 비교가 되지 않고 어떤 것보다 위대하다. 감히 쳐다보지 못할 창조의 존재가 어머니다. 만물은 자연 속에 있고 조물주의 손에서 생겨났다 하더라도 어머니의 희생과 정신은 오직 자식의 평안함과 안식에 있어 자식으로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위대한 존재다. 지구의 70%를 차지한 바다는 어머니와 같이 크고 거룩하며 그 넓은 가슴이 하늘을 닮아 파랗고 높다는 시인의 감성이 파도를 타고 온 세상에 퍼져갈 때 시가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인지를 말해준다. 
-이오장(시인)


곁길
 
이오례 시인

 
한 길로만 걷다 보니 길이 밋밋했다
밋밋한 길에서 곁길로 들었다
생기 도는 표정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구불구불한 곁길로 들어서니
마음을 풀어낼 공간이 보였다
행과 연 사이를 수없이 넘나드는 발상들
꽃이 되고 새가 되고
때론, 구름도 되었다가 빗물도 되었다가
포근한 햇빛이 되기도 한다
 
선명한 이름들이 펴낸 시의 꽃들은
힘든 일상으로 소리 없이 전달되어
마음과 마음이 이어져 공감대가 어우러진다
 
살아오면서 내가 가장 잘한 일은
곁길로 들어선 일이다
오래도록 가슴에 쌓인 이끼도 걷어내고
무뚝뚝한 언어도 부드럽게 버무려지는
긴장감 있는 곁길로 나는, 즐거운 직진이다 

 곁가지, 곁방살이, 곁들이 곁길 등은 우리에게 친숙한 단어들이다. 곁가지는 작아서 부러지기 쉬어 매달린다면 떨어지고 곁방살이는 가난을 보여주는 부끄러움이 앞서며 곁길은 다져지지 않아 언제 어디서 위험이 닥칠지 모른다. 고속도로의 곁길은 금지되어 있어 사고를 당하든가 아니면 과태료를 물어야 한다. 그런데 왜 곁길을 가게 되는 걸까. 인간이 지닌 모험심을 떠나 우리는 곁길을 찾는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본다. 하지만 이오례 시인의 곁길은 다르다. 우여곡절이 많은 평범한 곁길도 아니고 일탈하고 싶은 반항심도 아니다. 시인의 길을 택하여 가는 것이다. 누구나 시를 쓰지는 않는다. 자신의 맑은 정신을 갈고 닦아 고통과 슬픔, 비애와 고난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위로의 말은 전하려고 곁길을 택한다. 시의 길이 결코 곁길이라 할 수 없지만 이오례 시인은 분명히 고백한다. 원래 자신은 그 길을 갈 생각이 없었으나 우연히 시의 길을 엿보게 되고 그 길로 자랑스럽게 들어서서 훌륭하게 걷고 있다. 곁길로 접어들었지만 직진을 다짐한 것이다. 살아오면서 가장 잘한 일이 시의 길을 택한 것이라는 고백은 시인들에게 용기와 격려가 된다. 
-이오장(시인)

이오장 약력

- 한국문인협회 이사,
- 국제PEN한국본부 문화발전위원 
- 한국현대시인협회 부이사장
- 부천문인회 명예회장
- 제5회 전영택문학상, 제36회 시문학상 수상
- 시  집: 『왕릉』 『고라실의 안과 밖』 『천관녀의 달』 『99인의 자화상』 『상여소리』 등 16권
- 동시집: 『서쪽에서 해뜬 날』 『하얀 꽃바람』

 

부천=정석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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