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한정규
문학평론가 한정규

학습이나 경험에 의하지 않고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갖추고 있는 행동양식이나 능력이 있다. 그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욕심이다. 많든 적든 욕심이 있다. 그 욕심이 사람에 따라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런 욕심 중에 숨을 쉬는 것도, 먹는 것도, 보고 듣는 것도, 기억하는 것도, 손발을 움직이는 것도, 그 모두가 살기 위한 수단에서 비롯된 욕심이다. 
숨을 쉬지 않고 먹지 않으면 죽는다. 죽지 않으려는, 살아야 한다는, 욕심에서 숨도 쉬고 먹는다. 그런 먹는 것을 두고 소크라테스는 선악으로 구분했다. 먹기 위해 사는 사람을 악인이라 했으며, 살기위해 먹는 사람을 선인이라 했다. 
그러면서 소크라테스 자신은 살기위해 먹는다고 했다. 살기위해 먹고 마시는 선한 사람은 과욕 과음하지 않지만, 먹기 위해 사는 악한 사람은 과욕에 젖어 큰 욕심을 갖는다. 그 과정에 좋지 못한 행동을 하게 돼 있다. 탐욕이 발동한다.
먹고 마시기 위해 살던, 살기위해 먹고 마시던, 중요한 것은 행복을 위한 삶이냐 즐거운 삶이냐다. 즐거운 삶에 대해 기원 전 에피쿠로스는 즐거움이 곧 축복받은 행복한 삶의 시작이고 끝이다. 라고 말했으며 순간적인 기분이나 욕구가 아닌 감각적 즐거움의 필요성을 말했다. 그러면서 행복은 분별없는 소비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닌 욕망, 탐욕을 최소화해야 한다고도 했다. 
욕구와 탐욕, 만족과 탐닉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점을 찾는 방법으로 에피쿠로스가 탐욕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 믿고 계몽된 쾌락주의를 말했다. 
분명한 것은 탐욕은 탐욕에 탐욕을 일으키기 때문에 결코 채워 질수 없다. 탐욕이 이루어지면 또 다른 탐욕 자극을 끝없이 추구토록 한다. 그래서 축복받은 삶을 위해서는 탐욕으로부터 절제된 삶이어야 한다.
문제는 탐욕이 불행을 달고 다닌다. 다시 말해 모든 악의 근원으로 또 다른 탐욕을 불러 들여 끝을 보이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욕심에는 한계가 없다. 그래서 탐욕은 결코 채워질 수 없다. 그런 끝도 없이 발동하는 탐욕을 절제할 줄 아는 사람만이 축복받을 수 있다.
인간에게 과욕 탐욕이 악의 근원으로 가진 자와 못가진자를 만들었으며 빈부로 갈라놓았다. 탐욕이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의 것을 빼앗아 자본가와 노동자로 갈라놓았다.
결국 인간의 삶을 무소유에서 소유로 전환 지배와 피지배로 그게 다시 공유로 바뀌고 또 바뀌었다. 그게 모두 탐욕의 결과다. 
탐욕이 그토록 악을 만들었다. 욕망에의 집착이 고통의 원인이 됐다. 
유목생활에서 한 곳에 머물러 살며 여성들이 꼬챙이로 땅에 씨앗을 심는 농업혁명을 일으킨 1만 2000년 전에서 1만 년 전 그리고 20세기 2차 산업혁명 이후 과학문명의 급격한 발달로 새로운 물질이 다양화되자 삶의 질이 향상 사람들은 더 많은 탐욕에 빠져 제 정신을 잃은 가 싶더니 20세기후반 이후는 이웃, 일가친척, 부모형제자매 가리지 않고 범죄대상으로 악의 함정에 빠졌다. 그 모든 것 그 원인 탐욕에서 비롯됐다.
문명의 발달은 욕심을 탐욕으로 탐욕은 돌이킬 수 없는 악을 그렇게 악의 고리를 보다 빨리 보다 악랄하게 변화시키고 있다.
결국 탐욕이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 보다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그런 악의 고리인 탐욕에서 벗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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