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글을 못 썼어요. 그걸 겪고 난 뒤에는 책을 쓰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충만한 마음이 들더라구요. 책을 읽는 분들도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쇼코의 미소’로 2013년 작가세계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한 이후 여러 차례 중단편 소설로 문학상을 받았던 최은영 작가가 첫 장편소설 ‘밝은 밤’으로 돌아왔다.
최 작가는 지난 6일 서울 중구 뉴시스 사옥에서 인터뷰를 갖고 “책 내기 전에는 부담감이 많이 있었다. 이젠 그게 없다. 너무 기쁘고 더 바랄 게 없을 정도의 마음”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밝은 밤’은 작가가 지난해 봄부터 겨울까지 1년 동안 계간 ‘문학동네’에 연재한 작품을 공들여 다듬은 첫 장편소설이다. 출간과 동시에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7위를 차지하며 저력을 입증했다.
“인간이 살다보면 여러가지 일들이 있더라구요. 2019년에는 글을 전혀 못 썼어요. 이러다가는 글을 영영 못쓰겠다 싶어 2019년 말에 미국 어느 레지던스에 가서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그 순간이 너무 기억에 남아요. 글을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행복했어요.”
작품은 ‘증조모-할머니-엄마-나’로 이어지는 4대 여성들의 삶을 비추며 자연스럽게 100년의 시간을 관통한다.
최 작가는 “예전부터 과거, 내가 살아보지 못했던 시대에 대해 쓰고 싶었다”며 “아주 먼 과거 말고, 할머니나 증조할머니 등 가까운 과거에 한국 여성들이 어떻게 살았을까가 항상 궁금했다. 이런 이야기를 쓰게 될 줄 알았다”고 말했다.
증조모 ‘삼천’은 일제시대 백정의 딸이다. 그는 “’토지’에서 스치듯 봤던 백정 소녀의 이야기가 계속 기억에, 마음 아프게 남았었다”며 “일제시대에 그런 백정 아이가 있었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그런 스케치를 안고 처음 시작해서 글을 쭉 쓰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야기는 100% 허구지만 인물 면면에는 작가 자신을 포함해 할머니 등 주변 인물들이 반영됐다.
“지연(나)이는 자기가 계속 성과를 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30대 초반 여성입니다. 쉬지 않고 자신을 몰아부치다가 번아웃된 상태인데요. 제가 30대 초반 그 시절에 그랬던 것 같아요. 자신을 엄청 미워하고 몰아세우면서 나 자신을 힘들게 했죠.”
영옥 할머니에게도 작가의 할머니가 투영됐다. 그는 “실제로 할머니가 약간 쿨한 성격”이라며 “게임을 좋아한다거나 모임에 가서 춤을 춘다거나 이런 부분이 많이 들어갔다”고 전했다.
삼천의 친구 ‘새비’, 나의 친구 ‘지우’ 캐릭터에도 애정이 넘친다. 최 작가는 “새비는 삼천에게 유일한 인생의 사랑이자 자랑인 인물”이라며 “지우는 가족에게 충족받지 못한 힘과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친구”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하지만 가장 애착이 가는 인물은 역시 증조모 ‘삼천’이다. “처음 제게 와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게 해준 인물이죠. 가장 강렬하기도 하고 가엽기도 하고 대단하기도 하고, 여러 생각을 하게 해줬어요.”
제목 ‘밝은 밤’은 어두움 속에서도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미를 담았다. 그는 “처음엔 어두운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그 안에서 서로 주고받는 사랑이 있다고 느꼈다”며 “첫 연재 때 붙인 가제였는데 끝나고 나서 보니 맞다고 생각해서 제목으로 확정지었다”고 말했다.
‘밝은 밤’이 독자들에게 ‘자기 이해’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옛날에는 ‘자기 연민’이라는 말을 세상에서 제일 싫어했어요. 자기를 가여운 마음으로 바라보는게 얼마나 꼴보기 싫던지, 그래서 자기 연민 없이 가혹하게 살아왔죠. 그렇게 살다보니 건강에도 안 좋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안 좋아요. 생각해보니 ‘자기 연민’은 곧 ‘자기 이해’더라구요. 자기 자신에 대해 이해하고 자신을 더 따뜻한 눈으로 바라봤으면 좋겠어요.”
지난해 국내 대표 문학상 중 하나인 ‘이상문학상’ 거부로 화제가 됐다. 수상작 저작권을 3년간 출판사에 양도하고 작가 개인 단편집에 실을 때도 표제작으로 내세울 수 없다는 계약 요구사항에 반기를 들었다.
최 작가는 “저작권에 대해 잘 모르고 그저 글만 쓰고 살아온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 전에는 그냥 이상하다, 치사해서 안 한다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그럴 문제가 아니었다”며 “공론화하는 게 맞았던 것 같다”고 밝혔다.
“씁쓸한 경험이었어요. 생각해보니 제가 작가가 됐을 때 초반에 저작권을 갖고 협박하던 출판사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저작권은 당연히 작가에게 있는건데, 그런 걸 그냥 두다 보니 후배 작가들이 또 당하고, 정말 ‘모르는 게 죄’ 인거죠. 지금도 신인 작가들은 부당한 일을 겪고 있을 거예요.”
페미니즘 문학의 대표적 3040 여성 작가 중 한 명이기도 하다. 현재 한국사회를 관통하고 있는 페미니즘 논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페미니즘은 굉장히 단순한 이야기예요. 여자도 인간이라는 거죠. 페미니스트는, 여성도 인간이라는 걸 믿는 사람들입니다. 인간 사회의 그 어떠한 차별도 반대합니다”
한국어 강사 등 다른 일을 하다 20대 후반 뒤늦게 글쓰기에 뛰어들었다. 그는 “자신감이 없고 겁이 많은 스타일이다.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은 늘 있었지만 도전조차 해보지 못했다”며 “20대 후반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도전했다. 지금 이 일을 직업으로 할 수 있는 데 대해 너무 감사하다”고 했다.
“작가가 되기 전에는 항상 마음이 허했던 것 같아요. 채워지지 않는 느낌 속에서 살았죠. 소설을 쓰면서 채워지는 느낌을 받았어요. 물론 소심한 제게 이름, 얼굴이 노출된다는 건 엄청난 고통이기는 하지만 그 이상으로 일 자체가 주는 기분 좋은 느낌이 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약자’들을 대변하는 이야기를 쓸 계획이다. 그는 “어린이, 노인과 같은 목소리가 잘 안 들리는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며 “사람들은 그들에 대해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이라 생각하는데 우리는 다 과거 애였고, 나중에는 노인이 된다. 그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항상 쓰고 싶고, 쓰고 있다”고 말했다.
“코로나가 길어지다보니 모두가 많이 힘든 것 같아요. 작가들도 여행을 하면서 충전도 하고 그랬는데 그게 깨지니까 번아웃되고 창작에도 영향을 주더라구요. 다들 불만이 많이 쌓일 수밖에 없는 시기라 자기한테나 남에게나 거칠게 할 수 있는 때인 것 같아요. 이럴 때일수록 조바심을 갖지 말고, 자기 자신을 잘 돌보고, 말이라도 자기에게 계속 ‘괜찮아’라고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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