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의 순수함에 집중한 창극이 나왔다.

국립극장(극장장 안호상) 국립창극단(예술감독 김성녀) 신작 ‘트로이의 여인들’은 판소리 본연의 아름다움에 모든 에너지를 집중시킨 작품이다.

오는 20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에서 열리는 이 창극은 영적(靈的)이기까지 하다. 그동안 웅크려있던 소리의 순결과 한을 위한 판을 제대로 깔아줬다. 배역별로 지정된 악기는 소리와 고수, 두 명으로 세상을 만드는 판소리 본연의 그것이었다. 

기원전 1350년에서 기원전 1100년 사이에 일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트로이 전쟁과 관련된 신화와 전설이 현대의 한국 땅에서 공감을 얻는 이유다. 

헤큐바, 카산드라, 안드로마케, 헬레네로 대표되는 네 명의 여인들이 벼랑 끝에서 선택하는 각기 다른 감정과 삶의 방식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

이들과 아픔을 나누는 코러스들의 활약도 돋보였다. 판소리의 시김새(음을 꾸며내는 모양새)가 다른 형식으로 버무려진 셈이다. 

싱가포르 연출가 옹켕센은 소리를 위해 몸을 한껏 낮췄다. 명창 안숙선과 안 명창의 작창을 그대로 극에 녹여낸 정재일 음악감독은 연출의 의도를 그대로 살렸다. 

창극단 단원들로 인해 가능한 작품이기도 했다. 2시간 내내 한을 토해냈다. 트로이의 마지막 왕비 헤큐바 역의 김금미는 저러다 쓰러지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들 정도로 오열했다. 그녀의 주제 악기인 거문고의 처연한 선율이 목놓아 울었다. 

트로이 공주 카산드라 역의 이소연은 주제 악기가 대금. 그녀의 맑은 목소리와 죽향이 머금은 대금의 조화는 비극의 모래바람을 앞둔 전초전이었다. 

남편 헥토르마저 잃은데 이어 어린 아들 아스티아낙스를 그리스군에게 빼앗기는 안드로마케 역의 김지숙의 목소리는 절절한 아쟁과 한몸을 이뤘다. 슬픔을 주체할 수 없어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그녀의 소리는 그대로 관객들의 가슴에 꽂혔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자 트로이 파멸의 씨앗인 헬레네는 창극단의 남성 단원인 김준수가 맡았다. 창극계의 아이돌로 통하는 그는 곱상한 외모를 뽐내며, 중성적인 목소리로 이 처절한 비극에서 비켜나 있는 헬레네의 오묘한 분위기에 힘을 싣는다. 그의 주제 악기마저 국악기가 아닌 정 감독의 피아노 선율이다.

원작의 포세이돈 대신에 작가 배삼식이 등장시킨 고혼(孤魂, 孤는 고(高)와 이중적)은 앞과 마지막에 등장해 극의 완결성을 만든다. 유태평양과 함께 이 역을 나눠 맡는 안숙선 명창이 지난 11일 개막 무대에 올랐는데 그녀의 목소리는 한으로 삭막해진 이 세상에 위로의 물줄기를 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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