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향, 환상목욕탕-경계에서 스며 나온.
‘한국화가 죽었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한국화의 진보와 약진을 볼수 있는 전시가 열렸다.

금호미술관이 지난 22일 개막한 기획전 ‘무진기행’은 ‘한국화가 진부하다’는 인식을 단박에 깨트린다. 장르적 경계가 허물어진 동시대성을 획득한 한국화의 현재 모습을 건강하게 보여준다. ‘팝아트’에 기댔다는 반응도 있지만 30~40대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라는 측면에서 전통적 산수화의 다양한 변주는 한국화의 전망을 밝게 하고 있다.

지필묵을 버리지 않고 전통적인 수묵과 담채, 채색화의 계승과 나아가 매체에 대한 적극적 실험이 반영된 아크릴 채색화까지 확장된 한국화의 기운생동함이 돋보이는 자리다.

국내외적으로 주목받는 작가 14명이 참여했다. 강성은, 권순영, 기민정, 김민주, 김정욱, 김정향, 서민정, 신하순, 양유연, 이은실, 이진주, 임태규, 조송, 최은혜의 90여 점이 걸렸다.

중소형을 선보이는 갤러리 전시와 달리 대형 작품이 걸려 젊은 작가들의 역량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다. ‘그림 보는 맛’도 있다.

전시 제목 ‘무진기행’은 김승옥의 단편소설에서 차용했지만 그 내용을 소개하는 그림은 아니다. 

안개 자욱한 탈일상의 공간이자 시간이 중첩된 공간 무진에 투영된 소설 속 주인공의 욕망처럼 젊은 한국화가 작가들로서 개별화된 이상과 욕망을 전시장안에 풀어냈다.

14명의 작가들은 풍경뿐만 아니라, 다양한 대상들과 상상력을 결합해 ‘이상향’을 현란하고 유쾌하면서도 진중하게 또 그로데스크하게 동시대의 다양한 세계관을 선보인다.

먼저 전시장 1층은 임태규의 거대한 작품이 압도한다. 만화같은 장면들이 특유의 속도감 있는 필력으로 혼재돼 ‘무질서한 질서’의 판타지한 세계로 안내한다. 

가로 8m가 넘는 대작 ‘에레혼(EREHWON)’은 화면 속을 난무하는 사람과 동물, 사물들 가운데 문을 열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두 인물의 모습을 보여준다. 작가가 지난 2009년부터 진행한 작품으로 새로운 세계의 존재를 상정하고 이를 주제로 한 회화와 입체 작업이다. ‘에레혼’은 ‘Nowhere’의 철자를 거꾸로 뒤집어 만든 단어로 사무엘 버틀러(Samuel Butler)의 소설 제목에서 따왔다. 소설 속 ‘에레혼’이 19세기 영국 사회의 모습을 역설적이고 풍자적인 모습으로 보여준다면 임태규 작가는 역설적인 유토피아의 개념을 확장시켜 동시대 현실세계를 그의 상상세계로 유쾌하게 끌어왔다.

한지에 먹, 채색을 기본으로 한국화 기법을 계승한 ‘재기발랄한 한국화’로 지난 2006년 미술시장 스타작가로 주목받은 작가는 2009년부터 중국 베이징에서 활동하며, K-아트의 진가를 보여주고 있다. 내년에는 대만에서 개인전도 예정돼 있다.

지하 1층부터 3층까지 전시는 △갈등의 공간, 현실 △현실 속 도피와 휴식의 공간 △현실 너머의 이상의 세가지 주제로 ‘이상향’을 선보인다.

권순영 작가는 두려움의 기억을 그로테스크한 형상들과 성탄절의 환상적 이미지가 교차하는 풍경 속에 담았다. 그림의 주된 배경이 되는 크리스마스 풍경은 작가만의 기이한 판타지다. ‘고아들의 성탄’ 시리즈에 등장하는 눈사람이나 동물모양 풍선은 눈물을 흘리면서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데 오묘한 표정은 잔혹한 상황을 완충시키는 듯한 아득함을 연출한다. 환한 불빛과 어둠, 옅은 미소와 눈물, 그리고 기억과 상상이라는 모순된 세계지만, 수묵으로 표현한 크리스마스 그림이 이토록 멋질수 있다는 걸 새삼 보여준다.

이은실 작가는 전통적 공간 속에 드리운 성의 이미지와 그를 가리는 막의 존재를 통해 인간적 본능과 욕망을 터부시 하는 세태를 다룬다. 장지를 여러 장 겹친 뒤 그 위에 채색을 여러번 쌓고 세필로 형상을 그리는 방식으로 경계와 막의 이미지를 만들고 전통적 한국화에서의 공간구조를 차용해 드러나지 않은 인간에 내재된 성이나 본능, 사회적 규제에 관한 이야기를 속삭인다.

조송 작가는 어두운 먹과 채색, 그리고 냉소적인 언어로 죽음과 삶에 대한 집착에 대해 이진주 작가는 관련 없어 보이는 사물들간의 병치를 통해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기억의 모습을 전달한다. 먹과 주묵을 사용하는 서민정 작가는 불통의 세태 속에 앞으로 가능할 지 모를 소통에 대한 염원을 개의 이미지로 형상화한다. 

김민주 작가는 복잡한 현실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심정을 현실과 상상이 뒤섞인 자연 공간 이미지로서 나타내고 신하순 작가는 여행을 다니며, 본 풍경과 여행지에서의 소소한 기쁨을 먹과 색의 농담 속에 담는다. 

강성은 작가는 겹겹이 쌓은 연필선으로 개인적 여정 속에서 느낀 주변 환경의 온도와 질감을 표현하고자 하며, 최은혜 작가는 우거진 열대식물의 이미지를 통해 닿을 수 없는 이상과 현실의 교차지점을 그려낸다. 

기민정 작가는 통속적이면서도 가장 근원적인 인간의 욕망인 사랑이 충만한 세상을 이야기한다. 김정향 작가는 물과 목욕이라는 소재를 통해 치유와 회복이 있는 이상적 세계를 그리며, 양유연 작가는 유년기의 환상을 투사해 피난처로서 달의 이미지를 환상적으로 형상화하면서도 그 이면의 폭력적인 모습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서 이상향의 중의적 성격을 드러낸다. 

김정욱 외계인 같은 그림으로 과거-현재-미래, 성과 속이 혼재하는 이미지의 인물과 풍경들을 통해 현실로부터 이어진 이상향에 대한 사유를 담아낸다.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돼 있으며, 이분법적으로 구분할 수 없다는 깨달음을 먹의 다층적 깊이를 마리아, 천사, 성인, 아이, 외계인, 유령과 같은 유사-인간의 형상의 생명체들을 통해 이야기한다.

김윤옥 큐레이터는 “이번 전시는 동시대 미술의 흐름과 수요를 반영하고 현대미술 장르들의 균형 있는 발전을 도모하는 취지에서 마련한 한국화 기획전”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오는 2017년 2월12일까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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