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떠나고 홀로 외로운 투쟁, 죽으면 죽었지 포기하지 못해”
“다 떠나고 홀로 외로운 투쟁, 죽으면 죽었지 포기하지 못해”
  • 승인 2011.04.01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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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획-개발광풍속 철거민들> 용산구 신계동 철거민들을 찾아서

하루 종일 우르릉 쿵쾅 집 부수는 소리가 심장을 울려댄다. 괴물의 울부짖음, 죽을 지경이다. 최후 통첩장이 날아왔다. ‘철거.’ 두 음절의 글자가 가슴에 박힌다. 자칫 이대로 있다간 포클레인 삽날에 산채로 매몰되는 소같은 신세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가야 하는데…갈 곳이 없다. 가야 하는데…. 용산참사 2년이 지났다. 포클레인 굉음은 그치지 않는다. 개발광풍 속 철거민들의 오늘이다. <위클리서울>은 서울과 수도권 지역 철거민들의 실상을 기획시리즈로 진단해보고 있다. 지난 호 동작구 상도동 세입자들에 이어 이번호엔 용산구 신계동 철거민들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대책없는 정부, 제2, 제3 용산 계속 될 것”

신계동엔 이제 철거민이 없다. 철거 현장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시공사인 대림건설은 성공리에 입성했다. 4월부터 아파트 입주가 시작된다. 그럼에도 신계동엔 철거대책위원회가 남아있다. 위원장 강정희 씨와 김주환 씨가 철대위 소속이다. 김주환 씨는 용산참사 현장에서 연대투쟁을 하다가 지난해 구속?수감됐다. 이제 강 씨 혼자 남았다. 김 씨가 5년형을 선고받았으니 투쟁은 외롭기만 하다.
“가장 기본적인 걸 요구했어요. 공사 끝날 때까지 임시 주거시설 마련해 달라, 짓고 나면 임대아파트 달라. 이게 기본적 요구사항이에요. 살 곳이 없으니까 살 곳을 달라는 거죠.”
용산참사 이야기를 하면서 강 씨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살기 위해 망루에 올라갔는데 하루 만에 특공대를 투입하다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정부가 망루투쟁을 하게 만든다”며 “정부가 세입자에게 주거권·생존권 대책을 내놓지 않으면 제2, 제3, 제4의 용산참사가 계속 일어날 것”이라 경고했다.



신계동의 경우 20년 전부터 개발을 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러나 좀처럼 개발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강 씨는 “설마 개발이 되겠나” 싶어 2004년 신계동으로 이사를 왔다. 강 씨에게 신계동은 어렸을 적 어머니와 함께 살던 고향 같은 곳이기도 하다. 강 씨가 시집을 간 이후 어머니 홀로 신계동에 남았다. 강 씨는 IMF 이후 수입이 줄어 전월세가 싼 동네를 찾다가 다시 이곳으로 왔다. 어머니 집과는 몇 블록 떨어지지 않은 곳에 집을 마련했다. 
보증금은 500만원이었다. 집은 형편없었다. 곳곳에 금이 간 상태였다. 집주인은 강 씨에게 보증금 3000만원을 내면 수리를 해주겠다고 했다. 강 씨는 형편이 마땅치 않아 자신이 직접 손보기로 했다. 수리비를 최소화 했지만 1200만원이 들었다.
5년은 살 줄 알았다. 2008년 관리처분이 났고 그해 3월부터 공사가 본격화 됐다. 조합의 권유와 회유, 용역들의 협박 등에 못 이겨 상당수 세입자들은 터무니없는 이주비를 받고 기곳을 떠났다.
20%에 해당하는 나머지 세입자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눈 씻고 찾아도 갈 곳은 없었다. 집주인들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집주인의 얼굴을 본 세입자들은 흔치 않았다. 강 씨는 “처음엔 보증금도 받지 못했다. 수소문 끝에 2010년이 돼서야 받았다. 애초 집주인 얼굴도 몰랐기 때문이다. 대리인과 계약했었다. 얼굴을 맞대고 계약을 했어야 하나 대부분의 세입자들은 대리계약을 했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집주인들은 수도권 등 타지역에 살고 있었다. 한마디로 투기꾼들이었다.



여느 철거 현장과 마찬가지로 전쟁 같은 일상이 이어졌다. 전철연 등 시민사회단체를 통해 개발 방식의 모순과 실체를 알 수 있었다. 일부 언론들의 ‘용산참사는 전철연의 개입 때문에 일어났다’는 주장에도 할 말이 많다.
“국가는 나의 권리를 알려주지 않아요. 그래서 전철연에 가입하게 된 거예요. 전철연은 철거민들이 모여 만든 단체니까, 내가 바로 전철연이에요. 다 철거 현장에서 고통을 안고 살았던 사람들이고. 내가 내 발로 찾아가 가입을 했던 거죠. (전철연이) 폭력성을 띤다고 하잖아요. 피부로 느끼지도 당해보지도 않고서 말해요. ‘똑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하겠냐’고 묻고 싶어요. 저도 옛날에는 투쟁의 ‘투’ 자도 몰랐던 사람이에요. ‘저 사람들 데모하네. 왜 그러지?’ 그리고 그게 길어지면 욕했던 사람이 나예요. ‘시끄럽게 그냥 주는 대로 받지, 더 달라고 저런다’ 그렇게 욕했죠. 그런데 투쟁하면서 왜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지 느꼈죠. 투쟁하면서 더 확고해졌어요. 절대 내 권리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내 아이들에게 이런 대물림을 해주면 안 되잖아요. 철거민이 없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어요. 끝을 봐야죠. 승리해야죠.”
‘이주비, 이사비, 임대주택’ 혜택을 모두 다 받을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계절은 수없이 바뀌었다.


“빚 5700만원, 고생은 계속 돼”

강 씨만 남았다. 사라진 현장, 아파트가 들어선 현장에서 투쟁하는 일은 다소 멋쩍다. 하소연 할 곳은 용산구청 밖에 없었다. 2010년 8월부터 용산구청에 돗자리를 깔았다. 돗자리에서 잠을 청했다. 여름이라 가능했다. 날이 쌀쌀해지면서부터는 전철연이 제공한 봉고차에서 잤다. 바깥 생활은 몸을 망쳐놓았다. 급성폐렴에 걸려 응급실에 실려 가기도 했다. 가까스로 죽을 위기를 넘겼다. 의사는 몇 분만 늦었어도 심장이 멈췄을 것이라고 했다.
포기할 수 없었다. 약을 사 먹으며 구청 앞에서 버텨왔다. 강 씨는 “사실 이렇게 오랜 시간 구청 앞에서 투쟁할 줄은 몰랐다”고 했다. 구청장이 도마에 올랐다. 지난해 6.2 지방선거 당시 민주당 소속 성장현 용산구청장 후보는 신계동 철거 현장을 찾았다. 강 씨의 손을 ‘꼬옥’ 잡았다. 철거민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구청장인 된 성장현 후보는 곁눈질 한번 주지 않았다고 했다. 강 씨는 “그게 다 한 표라도 얻기 위한 쇼였다”며 혀를 찼다. 강 씨는 “구청장이 되고 나서는 선례를 남기면 안 된다는 논리를 펴더라. 기업과 정당의 논리가 같다”고 비난했다.
강 씨는 또 “민주당 정치인들은 한나라당 정치인들보다 철거민들을 더 힘들게 한다”고 했다.



“한나라당 사람들은 어떻게든 농성장을 부수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언론에 알려지기라도 한다. 그런데 민주당 사람들은 ‘무대응 원칙’으로 일관한다. 시공사인 대림의 원칙과 같다.”
경찰 역시 무대응 원칙으로 일관하고 있다. 강 씨는 업무방해, 도로교통법 위반 등의 혐의로 수배자 신세이지만 연행당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연행해가면 이슈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벌금은 내야 했다. 처음엔 벌금 500만원을 선고받았다.
“울며불며 매달렸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철거민에게 500만원씩이나 선고하면 어떡하느냐고 법원에 호소했다. 여러 자문을 구하고 동분서주하던 끝에 100만원을 물게 됐다.”
이 과정에서 이혼의 아픔을 겪기도 했다. 철거가 되기 전까지 별 문제가 없는 가정이었다. 투쟁 과정에서 거주지는 불분명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컸다. 헤어지는 편이 서로를 위한 일이었다. 강 씨는 “재개발은 가정파탄을 몰고 오기도 한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강 씨의 빚은 5700만원. 생활은 빠듯하지만 병원비, 약값, 벌금 등으로 진 빚이다.  
“대학 2년생인 딸이 하나 있다. 엄마가 이러고 살다보니 딸도 사회 문제에 부쩍 관심이 많다. 하지만 포기하라는 말도 한다. 승산이 없는 싸움이라고 한다. 제게 희망은 자식 밖에 없다. 자식만큼은 열심히 공부해서, 나중에 혹 투쟁할 일이 있으면 좀 더 좋은 환경에서 투쟁했으면 한다.”
딸의 요구에 강 씨는 “죽으면 죽었지, 포기할 수 없다”고 했다. 죽지 못해 사는 것이라고 했다. 대안은 용산구청의 입장 변화에 있다. 강 씨는 “용산구청이 선대책?후철거?순환식 개발안을 적극 수렴해서 실천해야 한다”고 했다. 구청이 문제를 해결해준다 하더라도 강 씨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임대주택(5050만원)이 마련되더라도 1억에 달하는 빚을 지게 되는 것이다. 
공민재 기자 selfconsol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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