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피해 남국으로 내려왔소"
"세상 피해 남국으로 내려왔소"
  • 허철희 기자
  • 승인 2015.12.08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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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철희의 문화재 답사> 반계선생유적지

 

▲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소재 반계선생유적지(전라북도 기념물 제22호)


반계선생유적지
종 목:전라북도 기념물 제22호  
명 칭:반계선생유적지 (磻溪先生遺蹟地)  
분 류: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역사사건/ 역사사건  
수량/면적:일원
지정(등록)일:1974.09.27
소 재 지:전북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128-1  
시 대:  
소유자(소유단체):국유
관리자(관리단체):부안군


반계 유형원과 실학
실학(實學)은 조선 후기의 사회·경제적 변동에 따른 여러 가지 사회적 모순에 직면하여, 그 해결책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사회개혁사상이다. 임진왜란 이후 싹이 트고 18세기를 전후하여 재야의 진보적 지식인들에 의해 연구되어 영·정조 때 전성기를 이루었다.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백성들의 생활은 몹시 궁핍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유학자들은 실생활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론과 예법을 둘러싸고 논쟁하며 대립하였다. 이러한 학문 풍토를 과감히 탈피하고 나선 학자가 바로 반계 유형원이다.  

유형원은 혼란스러운 정계를 벗어나 부안의 우반동에 머물며 오직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는 당시의 학문이 백성들의 삶에서 멀어진 것을 비판하면서 실제로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나라를 부강하게 할 방안을 폭넓게 생각하고 연구하였다. 그는 정치, 경제, 사회 등 국정 전반에 걸쳐 개혁을 주장했고, 이러한 그의 실용적 학풍은 일부 학자들에게 이어졌다. 그 결과 실생활에서 잘 쓰이고, 생활을 풍족하게 하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의 학문인 ‘실학’이 등장하게 되었다.

유형원과 그를 계승한 초기의 실학자들은 성리학적 토대 위에서 현실의 경제적·사회적·제도적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관심을 가졌다. 그들 중, 18세기 초 실학을 발전시킨 성호 이익은 성리학자이면서 서학의 과학기술 문제와 사회제도 문제를 탐구하였던 학자였다.  

18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를 중심으로 한 ‘북학파’가 등장한다. 이들은 상공업의 발달을 중시하였으며, 청나라의 발달한 상공업과 과학기술을 개혁의 모범으로 삼고자 하였다.

이후 실학파는 이용후생을 강조하는 ‘북학파’와 경세치용(經世致用)을 중시하는 ‘성호학파’로 나뉘었다. 북학파는 18세기 후반에 그 활동을 종결하지만 청조로부터 적극적 문물의 섭취를 추구하는 입장은 19세기의 실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세기 초, 실학은 다산 정약용에 이르러 마침내 집대성되기에 이른다. 이익의 학통을 이어받은 다산은 실용적 개혁과 개방을 통해 부국강병을 주장하였으며, 각종 사회 개혁사상을 폭 넓게 제시하여 ‘묵은 나라를 새롭게 하고자’ 노력하였다.

반계 유형원으로부터 시작된 실학사상을 평하여 정인보는 ‘조선 근고의 학술사를 종계하여 보면 반계가 일조(一祖)요, 성호가 이조(二祖)요, 다산이 삼조(三祖)’라고 하였다.  

《반계수록(磻溪隨錄)》의 산실 ‘부안현 우반동’
실학의 비조(鼻祖)로 일컬어지는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은 그의 뛰어난 경륜에도 불구하고 초야에 묻혀 은둔생활을 하였는데, <반계수록>을 집필하며 20여 년을 보내고, 또 생을 마감한 곳이 바로 부안의 보안면 우동리이다. 이곳은 본래 우반동(愚磻洞)이라 하였는데 ‘반계(磻溪)’라는 호는 여기서 따왔다고 한다.

 

▲ 우반동 부안김씨 고문서 중의 하나로 반계 유형원의 할아버지 되시는 유성민이 김홍원에게 우반리 동변 일대를 팔면서 작성한 매매 문서이다. '證 長孫 學生 德彰' 학생 덕창이 이를 증했는데 덕창은 반계 유형원의 소년기 이름이다.


우반동 일대는 유형원의 9대조인 유관(柳寬:1346~1433)의 사폐지지(賜弊之地)이며, 유관의 6세손(반계의 할아버지)인 유성민(柳成民)이 이곳에 별장을 짓고 살았다는 기록이 유성민의 사위이며 뒷날 반계 유형원의 고모부이자 스승이던 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의 시에 보인다. 또, 우동리 부안김씨종중고문서(보물 제900호) 중에는 유형원의 할아버지 유성민이 해옹(海翁) 김홍원(金弘遠)에게 우반동 동변 일대를 팔면서 작성한 매매 문서가 전하는데 이 문서에도 우반동 일대가 유관의 사폐지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내가 긴히 돈 쓸 일이 있기 때문에 부안 입석면(立石面) 하리(下里) 우반(愚磻)에 있는 전답을 김홍원에게 판다. 이 전답은 나의 6대조이신 우의정 문간공(柳寬)께서 태조조에 개국공신으로 책봉되어 왕으로부터 받은 사폐지이다. 그런데 이곳이 서울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서 직접 관리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궁벽한 산골짜기에 있기 때문에... 농사를 짓지 않고 방치해 둔 지가 어언 수백 년이나 되었다. 그러다가 지난 임자년(1612) 가을에 내가 비로소 이곳으로 내려와 ... 논과 밭을 만들었는데... 그 후 지금까지 20여 년 동안 아무 탈 없이 이 땅을 경작해 오고 있다....(하략)“

이 문서가 작성될 때 유형원은 할아버지 유성민 곁에서 이 문서에 '證 長孫 學生 德彰'이라고 증(證)했는데, 덕창(德彰)은 유형원의 소년기 이름이다. 이 문서가 작성된 해는 인조 14(1636)년으로 유형원이 16세 때의 일이다.

유형원은 1622년(광해 14) 서울 소정릉동(지금의 貞洞)의 외삼춘 태호(太湖) 이원진(李元鎭, 우찬참 역임.) 집에서 태어났다. 세종조의 청백리로 우의정을 지낸 문간공(文簡公) 하정(夏亭) 유관(柳寬)의 9대손. 할아버지 유성민(柳成民)은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 후일 병조참판으로 증직됨.). 아버지 유흠(柳흠)은 문과급제하고 예문관 검열. 어머니 여주 이씨는 우참찬 이지완(李志完, 성호 이익의 종조부)의 딸이다.

아버지 유흠(1596~1623)은 유형원이 태어난 다음 해에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학사로 한창 이름을 날렸으나 ‘유몽인(柳夢寅)의 역옥(逆獄)’에 억울하게 연루되어 28세의 젊은 나이로 옥사했다. 유몽인은 인조반정 후 은둔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의 복위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고발을 받아 처형되었다. 이 ‘역옥’은 뒤에 무옥(誣獄)으로 밝혀지지만, 유형원의 가계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파탄되었다. 유형원이 2세 때의 일이다.

유형원은 비록 어려서 부친을 잃었지만 명문 사대부 가문의 외삼촌 태호(太湖) 이원진(李元鎭)과 고모부 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에게서 기초학문을 배웠다. 그는 어릴 적부터 사물을 탐구하는 데 남달랐다고 한다. 다산 정약용은 “여덟 살에 이미 《서경(書經)》과 《역경(易經)》을 읽은 천재”라고 적고 있다. 외삼촌 이원진은 성호 이익의 당숙으로 하멜표류사건 당시 제주목사로 있었던 사람으로 큰 학자였다. 고모부 김세렴은 유형원의 할아버지인 유성민의 사위로 함경도와 평안도 감사를 역임하였고, 호조판서, 대사헌까지 지낸 고관으로 학문까지 높았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 형편은 암울하기만 하였다. 그가 15세 되던 1636년(인조 14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유형원은 조부모님과 어머님을 모시고 강원도 원주로 피난을 갔었고, 다음해에 지금은 경기도 양평 땅인 지평(砥平) 화곡리로 이사하였다가 다시 이듬해에는 여주 백양동으로 옮기기도 하였다.  

유형원이 18세 되던 해에 풍산 심씨(沈氏, 부사 심향의 딸, 우의정 심수경의 증손녀)와 결혼하고, 또 21세 되던 해 겨울에는 아들 하(昰)가 태어났으나, 가정에는 연이어 불행이 닥쳤다. 23세 되던 해에 할머니상을 당했고, 25세에는 고모부이자 스승인 동명 김세렴의 상을, 27세에는 어머니 상을, 그리고 30세에는 마지막 육친인 할아버지 유성민 상을 당하였다.  

할아버지 상복을 벗은 유형원은 32세 되던 해(1653년, 효종 4년)에 가솔들을 이끌고 부안의 우반동으로 이거하였다. 그런 그는 ‘부안에 도착하여(到扶安)’라는 시 한 수를 남겼다.

세상 피해 남국으로 내려왔소
바닷가 곁에서 몸소 농사지으려고
창문 열면 어부들 노랫소리 좋을씨고
베개 베고 누우면 노 젓는 소리 들리네
포구는 모두 큰 바다로 통했는데
먼 산은 절반이나 구름에 잠겼네
모래 위 갈매기 놀리지 않고 날지 않으니
저들과 어울려 함께하며 살아야겠네

그는 곧 우반동 산자락에 ‘반계서당’을 짓고 제자 양성과 학문 생활에 몰두했는데, 성리학을 비롯하여 정치·경제·역사·지리·병법·문학 등 어느 것 하나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마음에 묘하게 부합되는 것이 있으면 밤중이라도 반드시 일어나 그것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스스로는 부족하다고 여겨, 매일 해가 질 때는 반드시 “오늘도 헛되게 보냈구나. 의리는 무궁한데 세월은 유한하니 옛사람은 무슨 정력으로 저렇게 성취했단 말인가?”라고 말했다. 이때의 모습을 후세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우반동은 변산에 있어 바닷가와 숲이 절승을 이루고 있었다. 삼간초옥을 송죽(松竹) 우거진 속에 지어 세상을 등지고 저술을 업으로 삼았다. …서재에는 서가를 만축(萬軸)의 서적이 있고 대사립문은 항상 닫혀 있었다. 사슴이 낮에도 울안을 찾아들면 선생은 이것을 낙으로 삼았다.…”

우반동으로 이거한 그는 이듬해(1654) 진사시(進士試)에 2등 제3인으로 합격하였으나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 시험에 나갔던 것으로 이후로는 다시 과장(科場)에 나가지 않았다. 경화사족(京華士族: 한양에 기거하는 문사권력층) 출신의 유형원이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관직에 나가는 것을 거부한 데는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한 부친의 참화가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 생각된다.

우반동으로 이거하기 한 해 전인 서른한 살 때(1652) 과거와는 거리가 먼 음운학에 관한 저술인 《정음지남(正音指南)》을 지었다. 그는 우리나라 어음(語音)이 동이(東夷)의 습속을 벗어나지 못함을 한탄하고 중국의 바른 음(正音)을 좇아가기 위해 중종(中宗)조에 최세진(崔世珍)이 지은《사성통해(四聲通解)》를 취하여 그 주해(註解)를 제거하고 음운(音韻)만을 밝혀 참고하기에 편리하도록 하고《정음지남(正音指南)》이라 이름하였다. 그런가 하면 이 해부터 《반계수록(磻溪隨錄)》을 저술하기 시작했다. 완성은 그로부터 18년 후인 1670년의 일이지만...,

35세 때인 1656년에는《동국여지지(東國與地志)》를 완성했다. 그는 우리나라의 지지(地志)가 고거(考據)할 만하지 못한데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이 있다하더라도 오로지 시문(詩文)만을 취하였고 또 ‘승람(勝覽)’이라는 이름이 이미 옛사람이 만든 ‘지지(地志)’의 뜻을 잃은 것이라 하여 이 책을 지었다.

이로 볼 때 유형원은 이미 과거지학(科擧之學)이 아닌 위인지학(爲人之學)으로의 방향을 정했음을 알 수 있다.

 

▲ 우동리 논 가운데에 돌기둥 하나가 서 있는데, 우동리 마을사람들에 의하면 이 돌기둥은 유형원이 병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여러 개의 돌기둥 중 하나라고 한다.


유형원이 어려서 겪은 임병양란은 그의 인생관과 세계관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국왕이 청나라에 항복하고 삼전도비를 세운 그 치욕을 씻지 못한 것을 심히 통한해하며, 언제나 복수설치(復讎雪恥)할 계책을 강구했다.

그런 그는 전국을 두루 여행했다. 그의 전국 여행은 훨씬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22세때(1643) 겨울 함경감사로 있는 고모부 김세렴을 함흥으로 뵙고, 이때 김세렴이 평안감사로 전직되자 고모부를 따라 가 평안도지역의 산천을 둘러보고 돌아왔는가 하면, 이후에도 금강산, 경기도 지역, 영·호남 지역 곳곳을 여행했는데 이러한 전국 여행은 향후 학문의 방향성을 잡는데 밑바탕이 되었다.

그는 국방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무릇 어디를 내왕할 때면 별도로 다른 길을 택하여 다니면서 그 산천을 역력히 유람하고 그 도로의 원근, 관방(關防)의 평탄하고 험준함을 익히 알게 되었다. 그리고 중국 쪽의 험한 요새와 수‧륙의 역참의 노정(路程)들을 일일이 기록해왔는데, 41세 때인 1662년에는 서울 소정릉동에 머무르며 나라를 다시 일으킬 방략인《중흥위략(中興偉略)》을 저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생전에는 완성을 보지 못했다.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석천리 산 28-1 소재 반계 유형원 선생 묘(경기도 기념물 제31호)

유형원은 우반동에 살면서 달이 뜨는 밤이면 거문고를 타면서 중국 음(音)으로 읊조렸는데 소리가 금석(金石) 같았다. 매양 집 뒤의 산꼭대기에 올라가 북쪽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으나 남들은 그 까닭을 알지 못하였다. 그는 농민을 직접 지도하는 한편, 구휼(救恤)을 위하여 양곡과 큰 배 4, 5척을 항상 비치해 구급(救急)에 대비하게 하였다. 집에는 하루 300리를 달릴 수 있는 준마를 사육하고, 양궁(良弓)과 조총을 가동(家僮)과 동리사람들에게 가르치며 여가가 있으면 연습토록 해서 묘수(妙手)가 된 자들이 200명이나 되었다.

우동리 논 가운데에 돌기둥 하나가 서 있는데, 우동리 마을사람들에 의하면 이 돌기둥은 유형원이 병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여러 개의 돌기둥 중 하나라고 한다. 여러 개의 돌기둥 중 또 하나는 우신마을의 정자나무 옆에 있었다가 해방되던 해에 태풍으로 나무가 부러지면서 함께 넘어졌다고 한다. 이 돌기둥의 높이는 3m, 동서 0.9m, 남북 0.4m의 사각 형태이다.

▲ 반계 유형원 선생 묘비(비문은 1768년(영조44) 유언지가 지었고 홍계희 글씨를 썼다.

44세 때인 1665년에는 변산 땅에 큰 인물이 숨어있다 해서 조정의 천거를 받았으나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듬해 이조참판 이상진(李尙眞)에 의해 다시 한 번 천거되었으나 ‘내가 지금 재상들을 알지 못하는데 그들은 어떻게 나를 안다고 하는 것일까’하며 끝내 응하지 않았다.

이 무렵 유형원은 고모부이자 스승인 김세렴의 비문 문제로 미수 허목(眉叟 許穆)을 만나 도리를 논하고 고금의 일을 상확(商確)하였는데, 허목은 탄복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유모(柳某, 유형원)는 군주를 도와 왕정을 이룩할 인재(王佐才)이니, 쇠(衰)한 세상에 이와 같은 인물이 나올 줄을 예상치 못하였다”고 한다.
 

반계수록, 어떤 책인가?
《반계수록(磻溪隨錄)》은 49세 때인 1670년에 완성하였다. ‘수록(隨錄)’이란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기록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반계가 우반동으로 내려오기 1년 전인 31세 되던 해부터 시작하여 19년에 걸쳐 쓴 이 26권의 기록은 그러나 결코 그 이름처럼 가볍지 않다.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조선의 질서를 대체할 새로운 국가 구상을 이 반계수록에 담았다.

생각하건대 왕도(王道)가 없어진 뒤로 만사가 기강을 잃어, 처음에는 사사로움을 따라 법을 만들더니, 끝내는 오랑캐가 중국을 지배하는 데 이르렀다. 우리나라도 고루한 폐습이 고쳐지지 않은 것이 많았는데, 더욱 쇠약해져 마침내는 (오랑캐에게) 큰 치욕을 당하고 말았다. 천하 국가가 대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나쁜 법을 고치지 않으면 치세(治世)로 돌아갈 수가 없다. (《수록》 권26, 〈書隨錄後〉)

위 글은 《반계수록》 집필의 의도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반계는 15세 때 병자호란(1636)을 만나 피난길에 나섰던 일을 가슴에 담고 살았다. 나라가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 어쩌다가 오랑캐라고 여기는 북방 민족에게 치욕을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을까?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할 방안은 무엇인가? 반계는 이 질문을 평생 간직하였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하였다.

반계는 그 근본 원인을 위정자의 사리사욕과 그로 인하여 생겨난 잘못된 제도(법)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그것을 고치지 않으면 국력의 신장은 기대할 수 없다고 보았다. 즉 반계 실학의 출발은 약해진 국력에 대한 처절한 반성과 그 극복을 위한 성찰의 결과였던 것이다.

 

▲ 실학박물관/실학의 비조 반게 유형원 전시실


반계수록의 구성과 내용
임병양란을 겪고 피폐해진 국력을 회복하기 위한 국가체제의 전반적인 개혁방안을 제시한《반계수록》은 폭 넓은 독서와 전국 유람, 당대 학자들과의 대담, 그리고 농촌 생활에 대한 직접 체험 등을 바탕으로 쓰여졌다. 총 13책 26권으로 구성된 《반계수록》의 주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전제(田制:토지제도)  
2. 전제후록(田制後錄:재정, 상공업 관계)  
3. 교선지제(敎選之制:향약, 교육, 고시 관계)  
4. 임관지제(任官之制:관료제도의 운용관계)  
5. 직관지제(職官之制:정부기구 관계)  
6. 녹제(祿制:관리들의 보수관계)  
7. 병제(兵制:군사제도의 운용관계)  
8. 병제후록(兵制後錄:축성, 병기, 교통, 통신 관계)  
9. 속편(續篇):의례, 언어, 기타
10. 보유편(補遺篇):군현제(郡縣制:지방제도 관계)  

《반계수록》에 나타난 사상적 특징은 부민(富民)·부국(富國)을 위해 제도적인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농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토지 제도를 개혁해야 하며, 그렇게 해야만 농민들에게 최소한의 경작지를 분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형원의 최대 목표는 자영농민(自營農民)을 육성해 민생의 안정과 국가 경제를 바로잡자는 것이었다. 토지는 국가가 공유하고 농민들에게 일정량의 경지만을 나누어주는 균전제를 주장하였다. 즉, 그는 경작하는 농민이 땅을 갖도록 해야 한다는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과 균전제 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 밖에도 병농일치의 군사 제도, 즉 부병제(府兵制)의 실시를 강조하였다. 원래 그가 주장한 균전제와 부병제는 중국의 수나라와 당나라에서 중시한 제도였다. 또한, 국가 재정을 확립시키기 위해 세제와 녹봉제의 정비도 주장하였다. 세제는 조(租)와 공물(貢物)을 합쳐 경세(經稅)라는 이름으로 불러야 하며, 경세는 수확량의 20분의 1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과거제의 폐지와 공거제(貢擧制) 실시, 신분제 및 직업 세습제의 개혁, 학제와 관료제의 개선 등 다방면에 걸쳐서 국운을 건 과감한 실천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이, 모든 제도의 개혁이 이루어지면 천덕(天德)과 왕도(王道)가 일치되어 이상국가가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이와 같은 주장은 실제로 실행되지는 못했으나, 개혁 의지와 사상은 당시 재야 지식인들의 이상론(理想論)이 되었으며, 후학들의 학풍 조성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그의 학문은 실학을 학문의 위치로 자리잡게 했으며, 이익, 안정복(安鼎福) 등으로 이어져 뒤에 후기 실학자로 불리는 정약용(丁若鏞) 등에게까지 미쳐 실학을 집대성하게 하였다.

우반동에 이거해 온지 20년 되던 해인 1673년(현종 14년) 3월 19일 인(寅) 시에 그는 그의 이상을 <반계수록> 26권에 수록해 두고 뜻을 펴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가 떠나자 우반동 반계서당 뒤에 가묘를 만들어 모시다가 그해 5월 죽산(竹山) 용천(湧泉) 정배산(鼎排山) 선영(현주소: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석천리 산 28-1)으로 이장했다. 1694년에는 부안의 사림이 부안현에 동림서원(東林書院)을 세우고 선생을 배향했다.

그가 죽은 지 1백여 년 뒤에 와서야 그의 인물됨과 <반계수록>의 내용이 알려지고 높은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1741년 승지 양득중(梁得中)이 상소하여 《반계수록(磻溪隧錄)》을 취해다가 국왕의 고람(考覽)에 대비하기를 청했다. 1746년 영조는 유신(儒臣) 홍계희(洪啓禧)에게 명하여 선생의 전기를 짓도록 했으며, 1770년에는 통정대부(通政大夫) · 호조참의(戶曹參議) 겸 세자시강원 찬선(贊善)의 관작을 추증하였다. 그리고 그해에 경상감영에 명하여《반계수록》을 간행하도록 하고, 그 인본을 다섯 곳의 사고(史庫)와 홍문관에 나누어 보관하도록 하였으니 그가 죽은 지 97년 뒤의 일이었다.  

 

▲ 반계수록/반계 유형원이 19년에 걸쳐 심혈을 기울여 저술한 명저(실학박물관 소장)


《반계수록》의 재조명
《반계수록》은 유형원의 사상과 국가 건설안이 담긴 대작이었으나, 그의 생존 시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1678년 배상유(裵尙瑜 : 1610~1686)가 숙종에게 추천했지만, 관심을 끌지 못하다가 새롭게 조명을 받은 것은 실학자들이 활약했던 18세기에 와서였다.

《반계수록》은 덕촌 양득중(梁得中 : 1665~1742)을 비롯하여 성호 이익(李瀷 : 1681~1763)과 그의 제자 순암 안정복(安鼎福 : 1712~1791)에 의해 비로소 세간에 알려지고 칭송받게 되었다. 양득중은 영조에게 《반계수록》의 간행을 추천하는 상소를 올렸고, 1750년 영조는 이 책의 간행을 허락하였다. 당시 3부가 간행되어 남한산성과 사고에 보관되었는데, 1770년 영조는 다시 경상관찰사에게 이 책의 목판인쇄를 지시했다. 특히 개혁군주였던 정조는 유형원의 개혁안을 다음과 같이 높이 평가했다.

“고(故) 처사(處士) 증(贈) 집의(執義) 겸 진선(進善) 유형원은 그가 지은 《반계수록보유(磻溪隨錄補遺)》에서 말하기를 ‘수원 도호부(水原都護府)는 광주(廣州)의 아래 지역인 일용면(一用面) 등지를 떼어 보태고 읍치(邑治)를 평야로 옮기면 내를 끼고 지세를 따라 읍성(邑城)을 쌓을 수 있다’ 하고, ‘읍치의 규모와 평야가 매우 훌륭하여 참으로 큰 번진(藩鎭)의 기상이 있는 지역으로서 안팎으로 만호(萬戶)를 수용할 수 있다’고 거듭 주장하였다. 또 말하기를 ‘성을 쌓는 부역은 향군(鄕軍)이 번을 드는 대신으로 내는 재물로 충당할 수 있다’고 하였다. 대체로 그 사람은 실용성 있는 학문으로 국가의 경제에 관한 글을 저술하였으니, 기특하도다. 그가 수원의 지형을 논하면서는 읍치를 옮기는 데 대한 계책과 성을 쌓는 데 대한 방략을 백 년 전 사람으로서 오늘날의 일을 환히 알았고, 면(面)을 합치고 번(番)을 드는 대신으로 돈을 내게 하는 등의 세세한 절목에 있어서도 모두 마치 병부(兵符)를 맞추듯이 착착 들어맞았다. 그의 글을 직접 읽고 그의 말을 직접 썼더라도 대단한 감회가 있다고 할 터인데, 그의 글을 보지 못했는데도 본 것과 같고 그의 말을 듣지 못했는데도 이미 쓰고 있으니, 나에게 있어서는 아침저녁으로 만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 반계 유형원의 친필편지/반계 유형원이 어느 현의 현감에게 보낸 편지로 그 현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 빼앗긴 송영준의 사연을 전하고 다시 되찾을 수 있도록 공정한 조치를 취해달라는 취지의 내용이다. 유형원의 수결이 흥미롭다.(실학박물관 소장)


다산 정약용(丁若鏞 : 1762~836)은 정조의 명으로 수원성을 축성하면서 유형원의 축성 이론을 적용하기도 했다. 결국 유형원의 실학사상은 성호 이익을 거쳐 순암 안정복, 다산 정약용 등 토지개혁을 중심으로 한 경세치용파(經世致用派)의 개혁방안으로 이어지는데, 그가 실학의 비조로 평가되는 것도 이러한 학문적 계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농촌 생활에서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당시 조선사회의 모순을 개혁하고자 한 그의 학문적 영역은 정치·경제·역사·지리·국방·언어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범위를 자랑했다.

유형원과 동시대를 살았던 소론계의 대학자 명재(明齋) 윤증(尹拯 :  1629~1714)은 호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반계수록》을 읽게 되었다고 하고, “그가 지닌 학문의 정밀함과 뜻과 도량의 원대함은 후세의 말 잘하는 선비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고 토로했다. 결국 영조대에 《반계수록》이 출판될 수 있었던 것은 스승 윤증으로부터 유형원의 책을 빌려 읽은 제자 양득중이 영조에게 간행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린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실학자 안정복은 남대문 밖 도저동(桃楮洞 : 현재 후암동 부근)에서 유형원의 증손인 유발(柳發 :  1683~1775)을 만나게 되었다. 안정복은 유발로부터 《반계수록》을 빌려 읽게 되었다. 유형원을 흠모한 안정복은 《반계수록》을 읽은 뒤 “참으로 하늘의 이치를 운용하여 만세를 위해 태평을 얻어주는 책이 아닐 수 없다”고 평가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안정복은 1776년(영조 52)에 <반계 선생연보>를 편찬하였다. 《반계수록》에 포함된 개혁방안은 19세기에도 이어져 대원군을 포함한 경세가들의 정책에 많이 반영되었다.

오랜 인습 속에 쌓여 온 조선후기 지배체제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새로운 경세론을 펼친 그의 국가개혁론은 새로운 시대를 열어 보려는 실천적인 변법론이라는 역사적 평가와 함께 1980년 이우성 교수에 의해 《반계잡고(磻溪雜考)》라는 새로운 자료가 공개되면서 조선후기 실학이라는 새로운 학풍이 성리학과 사상적으로 연관되어 설명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참고문헌:<우반동-전경목-신아출판사>, <국가개혁안을 제시한 실학의 비조 유형원-김태영-2011.12.20. 실학박물관>,<반계 유형원-부안여고 얼아로미-밝>, <실학의 비조 반계 유형원-허정균-부안21>

<‘부안21’ 발행인. 환경생태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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