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가 영화에 대한 꿈을 회복해주는 영화가 되길 바랐어요. 우린 아마 다들 그럴 거예요. 영화를 너무 사랑해서 영화를 만들고 있지만 어느 순간 환멸을 느낄 때가 있죠. 어떤 분야에서 일하든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과 사랑을 잃지 않길 바라면서 ‘거미집’을 만들었어요”
김지운(59) 감독에게 ‘거미집’을 왜 만들었냐고 물었다. 김지운 감독은 “다양한 방향에서 답을 할 수 있는 질문 같다”고 말하며 그 중 한 가지를 골랐다. 그 답변이 바로 영화를 향한 꿈과 사랑에 관한 얘기였다. 그는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묘한 상념에 빠질 때가 있었다고 했다. 영화가 사라져버리는 것. 팬데믹은 그만큼 거짓말 같은 사건이었다. “이젠 정말 끝인 걸까, 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2019년 역대 최다 관객인 2억2667만명을 기록한 한국 영화계는 이듬해 초 ‘기생충’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4관왕에 오르며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그간 쌓아온 성과는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2020년 초부터 본격화한 코로나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번지며 한국 영화계를 초토화했다. 2020년 관객수는 5952만명. 4분의1 토막이 났다. 이후 한국 영화는 현재까지 긴 침체기를 이어오고 있다. 김지운 감독은 2018년 ‘인랑’을 내놓은 이후 새 영화를 만들지 못했다.
“영화라는 건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가장 근접한 형태로 묘사하는 매체죠. 가장 강력한 매체이고요. 그게 덧없이 사라지는 것 같았던 겁니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다 그랬죠. 그러다 보니까 영화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영화란 무엇인가.’ 최근에 유독 영화에 관한 영화가 많이 나왔잖아요. 스티븐 스필버그도, 난니 모레티도, 쿠엔틴 타란티노도 만들었죠. 영화를 처음 사랑했을 때, 꿈을 갖기 시작했을 때, 내가 영화에 어떤 질문을 했었는지 기억하게 하는 작품들이었습니다. 그때 마침 ‘거미집’이 제게 들어온 겁니다”
‘거미집’은 1970년대를 배경으로 영화감독 김열(송강호)의 이야기를 그린다. ‘거미집’이라는 영화를 완성해놓은 김열은 마지막 몇 장면만 바꿔서 다시 촬영하면 이 작품이 걸작이 될 거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제작사에선 비용·검열 등 문제를 들어 반대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열은 재촬영을 밀어붙인다. 우여곡절 끝에 배우들을 다시 세트장에 불러모아 촬영에 들어가지만 영화를 걸작으로 만들어내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김지운 감독의 ‘거미집’은 이 과정을 코믹한 터치로 담아낸다.
김지운 감독은 “어쩌면 이 각본이 내게 온 건 영화에 의기소침해졌던 마음에 힘을 주고, 식었던 영화에 대한 사랑을 다시금 일깨워주기 위해 온 것 같았다”고 말했다. “이 시나리오가 제게 온 게 마치 격려 같았습니다. 저 역시도 ‘거미집’이 격려가 됐으면 합니다. 너무 이상적인 생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게 진짜 제 목표였습니다” 김지운 감독은 ‘거미집’ 투자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고 했다. 온라인 스트리밍 플랫폼에서 선보이는 걸 제안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 작품만큼은 절대 그럴 수 없었다. “영화에 관한 영화를 OTT에서 보여주는 건 앞뒤가 안 맞잖아요. 그건 자존심의 문제죠.”
말하자면 영화라는 건 그만큼 김지운 감독의 마음을 헤집어 놓는 한 가지다. 그는 “영화를 마주할 때면 나는 자꾸만 감정 기복이 심한 사람이 된다”고 했다. 평소엔 어떤 일에도 감정을 잘 드러내 보이지 않고, 현실에서만큼은 어떤 최악의 상황이 와도 시크하자, 쿨하자, 최소한 그런 척 유지하자, 유머를 잃지 말자는 게 그의 신조이지만 영화 현장에만 가면 그럴 수 없다는 얘기였다. 영화가 뭐길래.
“박찬욱 감독님이 그랬죠. 하루는 내가 천재 같았다가도 다른 하루는 쓰레기 같다고. 저도 그렇습니다. 현장에 있으면 하루에도 몇 번 씩 지옥과 천국을 오가요. 절망에 빠지고, 자기혐오에서 허우적 대죠. 반대로 환희와 기쁨을 느끼고요. 저만 그런 게 아닐 겁니다. 이 영화엔 제 심상이 들어가 있으면서 동시에 감독 모두의 심상이 있을 거예요”
김지운 감독은 이 말을 하면서 두 개 시퀀스를 꼽았다. 하나는 김열이 자신의 이상향으로 꼽는 신상호 감독(정우성)을 세트장에서 만나는 장면. 다른 하나는 세트장 뒤에서 배우 강호세(오정세)와 대화하는 장면. 예술가의 마음 속, 예술가의 현실이 이 장면들에 담겨 있다는 게 김지운 감독의 설명이었다. “내가 되고 싶은 어떤 모습이 있는데, 사실 현실은 그렇지가 않죠. 그때의 열등감 같은 게 신상호 감독 신(scene)에 있습니다. 강호세와 대화 장면에선 이 산업의 화려함 뒤의 앙상한 현실이 있어요. 김열이 말하잖아요. ‘나한텐 이거 밖에 없다’고. 얼마나 황폐한 겁니까, 김열의 마음 속이. 영화를 만든다는 게 그런 일인 것 같아요”
이 작품 속엔 인상적인 대사와 장면이 많지만, 아마도 관객 뇌리에 가장 깊이 박힐 것 중 하나가 김열이 그토록 원하던 쁠랑 세깡스(Plan Sequence·한 번의 긴 촬영으로 하나의 시퀀스가 완성되는 촬영 기법. 흔히 롱테이크 시퀀스라고도 함)를 만드는 대목일 것이다. 쁠랑 세깡스 촬영 후반부에 불이 나면서 사람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지만 김열은 오직 영화에만 빠져 있다. 모두가 사람을 구하려고 분주할 때 김열은 외친다. “다 잘 찍혔어?!” 김지운 감독은 영화라는 게 사람을 그렇게 만들기도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촬영 때를 떠올렸다.
“그때 제가 그랬어요. 대규모 폭발 장면이었죠. 세트에 불덩이가 옮겨 붙었죠. 다들 불씨 잡으려고 뛰어갔어요. 전 그들과 반대로 뛰어갔습니다. 저도 딱 그렇게 말했어요. ‘다 잘 찍혔어?!’ 영화라는 게 뭔지…”
어찌됐든 ‘거미집’은 한국영화 숨통을 트여 준다. 새롭다거나 혹은 다르다는 평가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작품을 만나기 쉽지 않은 최근 한국영화계 상황을 생각해보면 ‘거미집’은 명백히 신선하다. 이 작품은 한국영화에 없던 영화에 관한 영화이다. 어떤 한국영화도 직접 소환한 적 없는 1960~70년대 전설의 감독들을 호출하고 동시에 당시 영화 현장을 실감케 한다. 김지운 감독 초기작에서나 볼 수 있던 특유의 코미디를 20여년만에 다시 만날 수도 있다. 
흥행 배우와 흥행 감독이 만나 흥행할 만한 영화를 만드는 게 아니라 대중에서 몇 발자국 거리를 둔 다소 개인적인 영화를 내놨다는 것도 이채롭다. 김지운 감독은 “언제나 새로운 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제가 할리우드에 가서 영화를 찍었잖아요. 그때 전 한국에서 제가 하고 싶은 대로 영화를 만들 수 있었어요. 저한테 싫은 소리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요, 누릴 수 있는 게 너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건 좀 아닌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할리우드에 갔습니다. 저를 향한 리스펙을 모두 버리고 신인이 된 거죠. 제가 왜 계속 장르를 바꾸겠습니까. 했던 걸 또 하면 제 안에 생기가 안 도니까요. 내 안에서 머무를 순 없어요. 도태돼선 안 되죠. 늙지 말아야 해요” 김지운 감독은 그러면서 한 마디 덧붙였다. “자연인 김지운이 늙는 건 상관 없어요. 제 영화는 늙지 않았으면 해요”
김지운 감독은 현재 관객에겐 혁명적으로 다른 새로움이 필요한 것도 아니며 자신이 그런 영화를 만들 수도 없다고 했다. 관객도 자신도 반 보 혹은 한 보 정도 앞선 영화가 필요하고, 자신도 그런 영화를 내놓고 싶다고 했다. “그런 작품이 있다면 관객은 언제든 지지를 보내줄 준비를 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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