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연(47) PD의 ‘더 지니어스’(2013~2014)는 서바이벌 예능물에 한 획을 그었다. 대중적인 인기를 끌지는 못했지만, 탄탄한 마니아층을 형성해 시즌3까지 선보였다. 최근 공개한 ‘데블스 플랜’은 국내 시청자 사이에서 실망 섞인 반응이 쏟아졌는데, 세계 넷플릭스 TV쇼 부문 7위까지 올랐다. 넷플릭스를 통해 외연 확장에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미스 캐스팅’이라는 혹평에선 자유로울 수 없었다. 정 PD는 “현타가 온다”면서도 “캐스팅 밸런스가 좋지 않았다”고 인정했다.
“외연 확장은 중요한 부분이다. 그래서 넷플릭스와 함께 해야 했다. 어쨌든 제일 많은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지 않느냐. 이번 시즌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공리주의인데, 내가 전혀 생각하지 않은 방향이었다. 첫 경험이다. 그(궤도)의 일관된 철학이고, 제작진이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할 수 없다. 당혹스럽지만 어쩔 수 없었다. 궤도씨는 계속 인류애를 얘기했는데, ‘옳다, 그르다’를 떠나서 다들 빨리 집에 가기 싫어하는 그 감정은 맞다고 본다”
데블스 플랜은 12명이 일주일간 합숙하며 최대 상금 5억원을 걸고 펼친 두뇌 게임이다. ‘악마의 계획’이라는 제목에 맞게 매운 맛을 기대했는데, 맥 없는 서바이벌로 끝났다. ‘엔젤스 플랜’이 된 셈이다. 과학 유튜버 궤도가 공리주의를 내세우며 연합 플레이를 펼쳐 재미를 떨어트렸다. 게임 난이도는 꽤 높았지만, 출연진 활약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데스매치를 없앤 점도 영향을 끼쳤다. 해외 팬덤이 탄탄한 그룹 ‘세븐틴’ 승관을 섭외한 데는 “대중성을 위한 의도가 있었다”며 “그 중 마인드게임에 익숙한 출연자를 섭외했다. 게임할 때 공격·방어적인 플레이어 모두 필요한데, 이번엔 전체적인 밸런스가 좋지 않았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데블스 플랜에는 소위 ‘빌런’이 없었다. 정 PD는 “’악역만 모아 놓는다고 재미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주의다. “결과적으로 한 쪽에 쏠린 면이 있는데, 공리주의 영향이 있을 것”이라며 “궤도씨도 당황했다”고 귀띔했다. “궤도씨가 공리주의를 내세우면서 4일차 동물원 게임부터 이상하게 만들었다. 다른 사람과 경쟁하지 않고, 게임 자체와 게임하고 더 많은 사람에게 1점씩 나눠주려고 하지 않았느냐. 반대로 궤도씨가 무너지는 지점이 됐다”고 짚었다. “다들 자신만의 생각이 있어서 원하는 대로 안 됐고, 궤도씨도 심경 변화가 일어났다”며 “시청자 입장에선 ‘노잼’이라고 하지만, 어떻게 보면 캐릭터 서사에 있어서 중요한 게임이 됐다. 하석진씨의 변곡점이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게임 난이도가 높았을 뿐 아니라 설명이 길어 몰입하기 쉽지 않았다. “늘 고민한다. 게임 난이도를 맞추는 건 지상 과제에 가깝다”며 “멋을 부리려고 게임을 어렵게 하는 건 아니다. 게임 볼륨은 두꺼워도 룰과 난이도는 쉬워야 한다. 그래도 보드게임보다 룰이 복잡하지는 않은데, ‘더 쉬워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쉬워졌을 때 누구나 아는 해법이 존재하면 운과 순서 싸움이 될 수 있어서 밸런스를 맞추는 게 중요하다”고 짚었다.
결승전에서 배우 하석진이 궤도를 꺾고, 최종 상금 2억5000만원을 거머쥐었다. 정 PD는 “누굴 응원하는 건 없었다. 내가 감정을 쏟으면 쏠리지 않느냐”면서 “오랫동안 이런 프로그램을 해왔지만, 웬만하면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다. 야구 심판이 특정 팀을 응원하면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비유했다. 김동재가 초반에 떨어져 아쉽지는 않았을까. 비연예인 필기 전형에서 만점을 받은 인물이다. “출연자 탈락에 아쉬움의 정도를 말하기는 곤란하다”면서 “그 전에 아수라장이 돼 우는 사람이 많지 않았느냐. 플레이어들이 자신들의 욕망대로 된 건지 헷갈려하더라. 메인 매치 종료하고 감정적으로 파도가 일어나서 정돈하는 게 큰 과제였다”고 돌아봤다.
“(출연자들이 눈물을 많이 흘렸는데)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최종 3명이 남아서 밥을 먹을 때 ‘데블스 플랜이 일주일간 내 우주다. 바깥 세상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 1~2년간 겪는 감정의 파고를 일주일로 압축해 겪다 보니 몇 달간의 일처럼 느껴진 것 같다. 싸우면 정 든다고 하는데, 서동주씨가 한 명씩 떨어질 때마다 ‘내 우주가 무너지는 느낌’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일주일 동안 갇혀서 녹화하다 보니 끝나고 나서 우는 스태프들도 많았다. 물론 나에게 원인이 있을 수도 있다”
‘정종연표 서바이벌’은 상징성이 크다. 지니어스를 비롯해 ‘대탈출’(2018~2021) ‘여고추리반’(2021) 등 10년 넘게 한 우물을 판 덕분이다. 데블스 플랜 역시 정 PD가 만든 자체만으로 기대가 클 수밖에 없었다. “마음 다스리기가 쉽지 않은데, 자양분으로 삼으려고 노력한다”며 “무플보다 악플이 낫지 않느냐. 나를 향한 기대감 때문이니까. 나쁜 피드백을 받아서 욱하는 건 한 순간이고, 머릿속에 남아서 계속 생각한다. 지혜롭게 써먹는 건 나한테 달려있다”고 했다.
김태호 PD가 이끄는 TEO로 옮긴 후 처음으로 선보인 프로그램이라서 의미가 남다르다. 데블스 플랜2도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인터뷰 내내 첫 시즌이라고 표현해 시즌2가 확정된 듯한 뉘앙스를 풍겼다. “당연히 다음 시즌을 기대하면서 만든다. 넷플릭스 답을 기다려야 하는데, 안 하기엔 너무 많은 생각을 했다. 넷플릭스랑 또 하고 싶다. 상투적이지만 제2 출발하는 것 같다. 내 전성기가 지니어스라고 하는데, 10년이 됐다. CJ ENM을 21년 다니고 나와서 처음 하는 작품이라서 여러모로 고민이 많았다. 지니어스 시즌1 했을 때 기분이다. 이런 서바이벌을 기다린 사람들은 ‘조금 더 셌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다음엔 반영해서 더 잘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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