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항준(48) 감독이 스크린으로 돌아왔다. 초겨울 ‘스릴러 삼파전’에서 승기를 잡은 강하늘·김무열의 ‘기억의 밤’이 복귀작이다.

지난 2008년 ‘전투의 매너’ ‘음란한 사회’ 등을 내놓아 이 작품을 두고 ‘9년 만의 복귀작’이라지만 두 영화는 사실상 개봉 후 바로 케이블 영화 채널로 직행했다. 장 감독이 관객과 제대로 만난 것은 2003년 코미디 ‘불어라 봄바람’ 이후 14년 만이다.

짧게는 9년, 길게는 14년 메가폰을 놓은 사이 그는 어떻게 지냈을까. 오히려 더 바빴다. 

아내 김은희(45) 작가와 협업해 지난 2010년 tvN ‘위기일발 풍년빌라’, 2011년 SBS ‘싸인’ 등 극본을 썼다. ‘싸인’은 연출까지 했다. 2012년에는 SBS ‘드라마의 제왕’ 극본도 썼다. 2013년 SBS ‘별에서 온 그대’ 등 드라마에 카메오로 출연했다. 정점은 지난해 MBC ‘무한도전’ 특집 프로젝트 ‘무한상사’ 연출이었다.

지난 2013년 스릴러 ‘끝까지 산다’(감독 김성훈)를 각색하고 코미디 ‘아부의 왕’(감독 정승구) 등에 카메오 출연하는 등 영화계와도 인연을 이어갔으나 투자자들 사이에서 그는 이미 잊힌 인물이었다. 게다가 야심 차게 준비한 복귀작들이 번번이 좌초하면서 열망은 더욱 커졌지만 자신감은 점점 줄어들었다.

장 감독은 “사실 ‘이러다 내가 영화를 영영 만들 수 없게 되는 것 아닌가’하는 불안함이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적당히 타협해 하고 싶지는 않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남의 장단에 맞추면 그것은 춤이 아니다. 체조다. 한다면 정말 내가 하고 싶고 좋아하는 영화를 하자고 다짐했다”고 부연했다.

장 감독이 하고 싶고 좋아한 영화는 엉뚱하게도 ‘스릴러’였다. 

연출 데뷔작이자 출세작인 지난 2002년 ‘라이터를 켜라’등 전작들, 카메오 연기, ‘무한도전’ 등으로 형성한 ‘장항준=코미디’ 공식과 전혀 달랐다. 대중도 놀랐는데 투자자가 좋아할 리는 당연히 없었다. 

그도 부인하지 않는다.

“물론 코미디를 다시 했다면 복귀가 좀 더 빨랐을 것이다. 투자자들도 내게 웃기는 이미지가 있다고 생각했을 테고 전작도 코미디였으니 쉽게 지갑을 열었겠지” 

잘 알면서 왜 스릴러를 택한 것일까. 

“나이를 먹으니 인간 본연의 것들, 저 밑바닥에 있는 것들을 이야기하고 싶어지더라. 다른 감독이나 배우들도 그렇지 않나. 젊은 시절에는 코미디로 유명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진중한 작품을 한다. 내겐 그 진중한 작품이 스릴러 영화였다”

오랜만의 복귀작이다 보니 장 감독에게는 남모를 고통도 있었다. 

장 감독은 “아무 작품이나 갖고 돌아올 수는 없었다”며 “겨우 저것을 만들려고 9년 동안 영화계를 떠나 있었느냐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그래서 더 좋은 이야기를 찾아 고민하던 지난 2014년 말 한 술자리에서 그는 “집을 나갔던 사촌 형이 한 달 만에 돌아왔는데 전혀 다른 사람이 돼버렸다”는 지인의 이야기를 듣고 흥미를 느껴 ‘기억의 밤’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장 감독은 보통 한 달이면 초고를 완성할 정도로 필력을 자랑한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충무로 대표 스토리텔러’다. 그런 그가 ‘기억의 밤’ 초고를 쓰는 데 무려 1년 가까이 공을 들였다.

그는 “내가 조금 까부는 성격인데 이번에는 달랐다. 마음을 최대한 차분히 가라앉히고 글을 썼다. 조금 더 신중하게 하고 조금 더 고민하면서 작업했다”고 설명했다.

스릴러라고 하지만 장 감독의 손길 때문인지 이 영화는 우리가 익히 알고 흔히 접한 스릴러와 여러 면에서 다르다. 

장 감독은 “흔히 ‘스릴러’라고 하면 ‘범인이 누구냐’ ‘범인을 밝혀라’ 등이 공식이다. 하지만 그런 스릴러는 잘하는 분이 너무 많아 나는 이 작품에서 ‘왜’에 초점을 맞췄다”고 소개했다.

또한, “정통 스릴러는 천천히 시작하다 사건이 벌어지고 범인을 추적하기 시작하는데 포기하려는 순간 범인의 단서가 나타난다. 이후 범인이 막 폭주하고 주인공이 피치를 올려 잡으면 이야기가 끝난다. 그러나 우리 영화는 정반대다. 막 달리다 템포가 느려진다”고 덧붙였다.

신선할 수도 있지만 위험할 수도 있는 시도였다. 장 감독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것이 기존 스릴러와 차별점이지만 상업영화로서 결점이자 단점일 수도 있다. 관객은 장르가 변할 때 배신감을 느끼기 마련이니까”

장 감독은 “우리 영화를 보러 온 관객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난 팝콘과 콜라를 먹으면서 한껏 조이러 왔는데 이게 뭐야’라고. 그런데도 내가 그런 선택을 한 것은 ‘뒤’를 위해 ‘앞’을 만들었기 때문이다”고 밝혔다. 

여기서 ‘뒤’는 지난 1997년 IMF 외환위기와 이로 인한 가족의 해체, 붕괴 등 각종 부작용을 다룬 부분이다. 이 영화의 주제 의식이 녹아있다. 

이는 개봉 전 “스릴러 영화인데 메시지가 좀 무겁지 않냐” “영화, 특히 스릴러 주 관객층이 IMF를 경험하지 못 한 세대에게 통하겠냐” 등 우려를 낳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더욱 ‘기억의 밤’이 성공하기를 바란다.

“내 복귀작이라서가 아니다. 나를 믿어주고 내가 만드는 스릴러에 투자해준 분들이 십원짜리 하나 손해 보지 않았으면 한다”는 마음이다. 

만일 ‘기억의 밤’이 투자를 받지 못 했다면. 그래도 스릴러를 고집했을까. 

장 감독은 “그렇다”며 “아마 다른 스릴러를 썼을 것이다. 투자자들이 투자하지 않는 것을 나는 ‘내가 스릴러를 만들어서가 아니라 이번 시나리오가 재미없기 때문이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기억의 밤’은 지난 11월29일 개봉해 3일까지 약 57만 관객을 모으는 등 상승세를 타고 있다. 우려를 낳은 ‘뒤’ 이야기는 오히려 “심금을 울린다” “먹먹해진다” 등 호평과 함께 스릴러 장르와 거리가 멀었던 중장년층 관객을 극장으로 이끄는 동력이 되고 있다. 

9년 만의 등판을 금의환향으로 바꿀 가능성이 커진 장 감독이 구상하는 다음 작품 역시 스릴러다. 

그는 “내 스릴러 갈증이 아직 해소되지 않았나 보다. 늦바람이 무서운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너스레를 떤 뒤 “다음에는 온전한 장르 영화로서의 스릴러를 해보겠다. 관객이 원하는 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조여주는 것이다. 다만, 그 안에도 ‘기억의 밤’처럼 인간의 모습을 담을 것”이라며 “이번에는 9년이나 기다리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저작권자 © 경기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