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부터 최재형, 조카 레브 최, 형 알렉세이.

앞 회에서 언급했듯이, 1908년 4월 경 연추하리(延秋下里, 지금의 추카노보) 최재형(崔才亨)의 집에서 결성된 연추의병부대(일명 동의회·同議會)는 이범윤의 형이자 주(駐)러시아공사를 지낸 이범진(이범윤의 형)이 아들 이위종을 통해 군자금 1만 루블을 보내온 것이 바탕이 되었고, 여기에 이 지역 최고의 자산가로 러시아에 귀화한 고려인(高麗人·까레이스키) 최재형이 사재로 1만3천 루블을 출연했다.

연추의병부대가 결성된 연추 마을은 지신허(티진헤)와 더불어 러시아 최초의 조선인 마을이자 한반도·러시아·중국의 국경인 두만강과 지리적으로 가까워 연해주 일대 조선인 마을 중 가장 많은 조선인들이 거주했던 지역이었다. 연추는 한자로 延秋·煙秋·烟秋 등으로 표기해 왔는데, 이 같은 지명은 발해시대 염주(鹽州)의 발음이 변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러시아어로는 중국어 발음에 의거하여 얀치혜(Ianchikhe 또는 Yanchikhe)로 표기해 왔다.

연해주 고려인 역사의 발원지이자 구한말 의병운동의 중심지였으며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중심지 중 한 곳이었던 연추 마을은 1937년 극동러시아지역에 거주하던 약 17만여 명의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모두 강제 이주되면서 폐촌이 되어 사라지고 지금은 무성한 잡초더미 속에 이름 모를 조선 유랑민들의 무덤들만 버려져 있다. 이곳은 나라 잃은 조선의 이주민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연해주로 넘어오던  길목이었으며, 훈춘·북간도 등을 오갈 때 거쳐 가던 곳이었다. 

연추의병부대는 조선 국경지대의 일본군 수비대를 끊임없이 기습 공격해 막대한 피해를 입힘으로써 일제를 당황하게 만들었고 조선인의 변함없는 배일(排日)의지와 기개를 보여주었다. 그 동의회의 본부가 바로 이곳 연추에 있었다.  

연추는 당시 상연추(베르흐네 얀치헤)·중연추(스레드네예 얀치헤)·하연추(니즈네예 얀치헤) 세 마을로 나뉘어져 있었으나 1937년 스탈린정권이 이 지역의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 후 상연추와 중연추는 폐촌이 됐고, 하연추(연추하리) 마을 터에 현재 러시아인 마을인 추카노보(Tsukanovo) 마을이 들어서 있다.

연추하리는 안중근 의사가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라는 비밀결사를 결성한 마을이기도 하다. 안 의사는 1909년 3월 초 자신 외에 11명의 조선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왼손 약지 끝마디를 잘라 태극기에 ‘大韓獨立(대한독립)’이라는 혈서를 쓰고 단체 이름을 동의단지회라 했다. 

안 의사는 1909년 10월26일 오전 9시30분 하얼빈 역에서 조선 침략의 주역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응징한 후 일제 경찰의 심문에서 단지회원이 자신을 포함해  12명이라고 진술했으나 동지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 명단은 끝내 밝히지 않았다. 

최재형은 안중근 의거 당시 동의회 회원인 우덕순(禹德淳, 1876-1950)을 안중근과 동행하도록 주선하고, 함경북도 원산 길명 출신 유동하(劉東夏, 1892-1918)와 조도선(曺道先)으로 하여금 통역으로 합류하도록 해 거사자금 일체를 지원했다.

이토는 일본의 초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낸 후로도 세 번이나 더 총리를 역임하고 초대 조선통감으로 부임해 조선합병을 마무리 지은 조선침략의 설계자이자 주역으로, 그는 당시 조선통감을 지낸 후 일본의 추밀원 의장으로 복귀해 조선반도를 넘어 중국과 러시아 동부지역까지 정복하려는 야심을 설계하고 있던 중이었다. 
▲ 연해주 최고의 자산가였던 독립운동가 최재형의 생가.


노비의 아들 항일구국의 큰별이 되다 

당시 극동러시아 프리모르스키(연해주)지역에서 ‘한국독립운동의 대부(代父)’로 불리던 이 지역 최고의 거부 최재형(崔在亨. 1860-1920)은 함경북도 경원(慶源)에서 노비였던 아버지 최흥백과 기생인 어머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아홉 살 때인 1869년(고종 7년) 음력 7월 강풍과 흙비를 동반한 대홍수가 함경북도 일대를 휩쓸어 큰 흉년(기사흉년·己巳凶年)이 들었다. 이때의 천재지변으로 육진(六鎭)지방은 ‘한줌의 벼도 한 뿌리의 채소도 거둘 것이 없어 굶어죽은 시체가 온 산야에 허옇게 널려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해 9월 최재형의 가족은 기근과 아사를 피하기 위해 러시아 땅 티신혜(Tizinkhe, 地新墟)로 이주했다. 

최재형은 가족을 따라 러시아 땅 연해주로 왔으나 그곳에서의 삶도 배고프고 가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최재형은 굶는 날이 먹는 날보다 많은 생활을 견디다 못해 열한 살 때 집을 뛰쳐나와 버렸다. 포시에트 항(Poset. 두만강 하류, 연해주 남부 국경 근처 항구도시) 부두에서 노동일을 하면서 지내던 그는 배고품과 과로로 쓰러져 자다가 선원들에게 발견돼 무역선 선원이 된다. 

최재형이 무역선 선원으로 일하는 동안 그의 됨됨이를 눈 여겨 보던 러시아인 선장은 최재형을 양자로 삼아 ‘표트르 세메노비치’라는 러시아 이름으로 바꾸어주고 러시아 국적으로 귀화시켰다. 선장에겐 아들이 없었다. 양부(養父)인 선장은 최재형을 러시아 학교에 입학시켜 정규교육을 받도록 했으며 배를 타고 세계를 돌며 견문을 넓히고 무역업무와 외국어 실력을 익히도록 해주었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최재형은 러시아 해군 소위로 임관되어 사령관 급 지휘관의 통역관으로 복무했다. 그는 러시아군 통역 일을 할 때나 해군 장교로 복무할 때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성품과 남을 먼저 배려하고 존중하는 따뜻한 인품으로 러시아 군부의 고위직 인사들로부터 신망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 이 같은 인품과 그로 인해 형성된 인맥이 그를 거부로 만든 바탕이 되었다.

일제가 조선을 병탄하자 극동러시아에서 군수업(軍需業)으로 막대한 부(富)를 쌓은 최재형은 전 재산을 조국의 독립운동에 쏟아 부었다. 다음 회에서는 그의 구국투쟁 행적을 따라가 보기로 한다.

(계속).


발문

극동러시아 프리모르스키(연해주)지역에서 ‘한국독립운동의 대부(代父)’로 불리던 이 지역 최고의 거부(巨富)이자 대표적인 항일구국 지사 최재형(崔在亨. 1860-1920)은 함경북도 경원(慶源)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조선에서 노비(奴婢)였고 어머니는 기생(妓生)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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