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시아 프리모르스키(연해주) 지역  한국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함경북도 일대를 휩쓴 기사흉년(己巳凶年) 때 가족을 따라 러시아 땅으로 이주한 노비(奴婢)의 아들 최재형은 러시아 군대에 식자재를 납품하는 군납사업으로 연해주 최고의 거부(巨富)가 되었다. 당시 최재형이 러시아 군대에 납품한 소고기만 한 달에 150마리 분량이었고 한다. 

큰돈을 모은 최재형은 연해주 일대에 조선인 학교 30여 곳을 세워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매년 교포학생을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에 유학시켜 서양의 신학문을 익히도록 했다. 이와 함께 동포들에게 가축농장을 운영해 러시아 군대에 고기와 우유 계란 등을 납품할 수 있도록 주선하고 자금도 지원했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乙巳勒約) 체결로 조선에 일제 통감부가 설치되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당한 데 이어 1907년 8월1일에는 대한제국의 최후 보루인 군대까지 강제 해산되자 최재형은 전 재산을 항일구국운동 자금으로 투입하기 시작했다.  

1908년 4월 연추(延秋 또는 烟秋⋅얀치헤, 지금의 추카노브카)에서 이범윤, 이위종, 엄인섭(嚴仁燮), 안중근 등과 함께 연추의병의 구심체인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한 최재형은 크라스키노(Kraskino, 당시 노보키예프스크) 인근 자신의 소유지에 의병기지를 건설하고 연해주로 망명해온 대한제국 해산군인 및 이주 조선인 청년들을 규합해 항일군(연추의병)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크라스키노는 연추와 가까운(3~4킬로미터) 지점에 있어 연추와 크라스키노를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연추의병부대는 1908년 6~7월부터 국내 진격을 감행, 나남(羅南, 지금의 청진)에 사령부를 둔 일본군 19사단과 격전을 벌이는가 하면 국경지역의 일본군 수비대와 일제기관을 습격하는 등 본격적인 독립전쟁에 나섰다. 러시아 황제는 최재형을 노보키예프스크 도헌(都憲)에 임명, 다섯 차례의 공로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1908년 이상설(李相卨, 헤이그 밀사의 정사⋅正使)이 상하이를 거쳐 연추로 망명해오고, 뒤이어 호좌의진(湖左義陳)의 의병장 류인석(柳麟錫)이 만주를 거쳐 연추로 넘어와 연추의병에 합류했다. 연추의병은 1909년 무렵까지 활발하게 활동했으나 일본군의 증강과 러시아 당국의 단속강화로 점차 쇠퇴해갔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간되던 한글신문인 해조신문(海朝新聞)이 1908년 5월 운영난으로 폐간되자 최재형은 그해 6월 거금을 희사해 교민단체인 한국국민회(韓國國民會)로 하여금 판권을 인수해 기관지로 발행하도록 지원했다. 대동공보(大東共報)로 이름을 바꾼 이 신문은 교포의 계몽과 항일사상 고취에 힘썼으나 1910년 재정난으로 휴간하게 되자 최재형은 직접 사장에 취임하여 신문을 계속 발행, 동포들의 자주독립 정신을 고취하고 국권회복의 의지를 다지는 데 큰 몫을 했다.


▲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하고 체포되는 안중근 의사(왼쪽).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거사

최재형이 재정적으로 지원

최재형은 크라스키노 한족민회장(韓族民會長)을 겸임하고 있던 1911년 5월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에서 이상설⋅홍범도(洪範圖)⋅이종호(李鍾浩)⋅엄인섭 등과 함께 항일독립운동단체인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취임했다. 권업회 본부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지금의 하바로프스카야 거리에 있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 성재 이동휘(誠齋 李東輝)의 집 옆이다. 최재형은 이곳에서 대동공보와 함께 권업회(勸業會)의 기관지인 권업신문(勸業新聞)을 발행했다.

1919년 4월10일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대한민국임시정부 제1회 의정원 회의(의장 석오 이동녕⋅石吾 李東寧)에서 최재형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으로 선출되었으나 연해주에서 항일투쟁을 계속하겠다며 취임을 사양했다. 

조선침략의 주역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처단을 결심한 안중근은 노보키예프스크의 최재형 집에 기거하면서 최재형으로부터 일체의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 최재형의 딸 올가 페트로브나는 회고록에서 “노보키예프스크에 살 때 안응칠(安應七, 안 의사의 아명)이라는 분이 우리 집에서 함께 살았는데, 누군가를 단죄할 것이라면서 마당 벽에 사람 셋을 그려놓고 권총 사격훈련을 했다. 그 후 그분이 하얼빈으로 가서 일본의 어떤 요인을 사살하고 자신도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다”라고 회상했다.

안중근의 거사자금 역시 최재형이 지원했다. 헤이그 밀사로 가기 위해 러시아에 온 이상설⋅이위종⋅이준(李儁) 등도 최재형의 집에서 머물다 떠났다. 최재형은 1909년 10월26일의 안중근 하얼빈 거사 후 엄정한 재판을 받도록 하기 위해 제정러시아 당국을 움직여 안 의사를 러시아 법정에 세우고자 노력했으나 일제의 반대에 부딪쳐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1920년 4월 4~5일 일본군이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 지역의 러시아 관공서, 적위군 부대, 신한촌 등을 대대적으로 공격한 ‘4월 참변’이 일어나 조선인 마을이 모두 불태워지고 조선인 수천 명이 살해되었다. 독립군 조직도 철저히 와해되었다.

이 때 최재형은 적위군의 항일 파르티잔과 함께 대일항전을 벌이다가 4월4일 밤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가족들은 그에게 파르티잔 부대로 도망갈 것을 권했으나 최재형은 “내가 도망치면 우리 가족 모두 일본군에 죽는다. 나는 살만큼 살았다. 우리 가족을 대신해 내가 목숨을 버릴 수밖에 없다”고 했다. 가족은 밤새 울었다(최재형의 딸 올가 페트로브나의 회고록).

최재형은 4월5일 새벽 우수리스크의 자택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우수리스크 감옥 뒤편 왕바실재라는 산기슭에서 김이직(金利稷)⋅황경섭(黃景燮)⋅엄주필(嚴周珌) 등과 함께 총살당했다. 그의 나이 만 예순 살 때였다. 일본군은 최재형 등 조선독립운동가들을 학살하고 한 구덩이에 묻은 후 흔적을 감추기 위해 묘를 평토(平土)로 만들었다. 

최재형이 프리모르스키(연해주)지역 몇 곳에서 살았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그의 마지막 거주지였던 옛집이 우수리스크 보로다르스카야 38번지에 남아 있고, 첫 번째 집은 우수리스크 시 수하노바 32번지에 남아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최재형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했으며 2016년 8월15일에는 모스크바에 사는 최재형의 손자 최 발렌친에게 대한민국 국적을 부여했다.

<계속>

발문

최재형의 딸 올가 페트로브나는 회고록에서 노보키예프스크에 살 때 안응칠(안 의사의 아명)이라는 분이 우리 집에서 함께 살았는데, 누군가를 단죄할 것이라면서 마당 벽에 사람 셋을 그려놓고 권총 사격훈련을 했다. 그 후 그분이 하얼빈으로 가서 일본의 요인을 사살하고 자신도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다라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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