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헤이그 밀사. 이준(왼쪽), 이상설(가운데), 이위종(오른쪽).

1917년 3월 바람 부는 황량한 극동러시아 우수리스크(Ussuriysk), 옛 발해(渤海)의  땅인 수이푼 강(라즈돌나야 강·솔빈 강) 가에서 석오 이동녕(石吾 李東寧) 등 조선의 망명 지사들이 한 독립운동가의 시신을 화장했다. 

헤이그 밀사의 정사(正使)였고, 1906년 북간도 연길현(延吉縣) 육두구(六頭溝) 용정촌(龍井村·룽징춘)에 한국 최초의 민족교육기관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했던 독립운동가 보재 이상설(溥齋 李相卨, 1870-1917)의 유해였다. 서전서숙은 민족교육으로 항일독립운동의 기본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설립되었으며, 교사의 월급과 교재비, 학생의 학용품 등 일체의 경비는 이상설이 사재로 부담한 무상교육이었다. 

이상설은 임종을 맞으면서 “조국의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죽으니 영혼인들 무슨 염치로 고국 땅을 밟을 수 있겠는가. 내 죽거든 화장하여 재를 발해의 고토(故土)였던 솔빈 강에 뿌려 달라. 그리고 조국의 독립이 오기 전에는 제사를 지내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다. 유언에 따라 유해는 화장하고 문고도 모두 불태워졌다. 그리고 2001년 10월 그 솔빈 강(라즈돌나야 강)가에 이상설 유허비가 세워졌다.

후덕한 인품이었지만 절의가 굳기로 이름 난 이상설은 고종황제의 절대적인 신임과 총애를 받은 고굉지신(股肱之臣)이었으며 학문적으로도 ‘율곡 이이(栗谷 李珥)를 조술(祖述·뒤를 이음)할 대학자’로 평가될 정도로 존경받는 유학자였다. 그는 나라가 기울자 국권회복을 위해 먼 이역에서 가시밭길 같은 한 생애를 불사르다 1917년 망명지인 극동러시아 프리모르스키 지구(Primorsky Krai·연해주)의 우수리스크에서 병을 얻어 마흔여덟의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이상설을 동지이자 스승으로 여겨온 우당 이회영(友堂 李會榮, 만주 신흥무관학교 설립자)은 뒤늦게 부음 소식을 접하고 밤새 울었다고 한다. 이상설은 이회영보다 세 살 아래였지만 두 사람은 지기(志氣)가 맞아 생사를 함께 하기로 한 동지였다. 

우수리스크는 청나라 때 쌍성자(雙城子)라고도 불렸으며, 본디 1935년까지는 니콜리스크 우수리스키(Nikol’sk-Ussuriiski)로, 그 후 보로실로프(Voroshilov)로 불리다가 1957년 지금의 우수리스크로 지명이 바뀌었다. 

우수리스크 시 남쪽의 라즈돌나야 강 건너에는 아무르 주 크라스노야르 성터가 남아 있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국(渤海國, 698-926)의 5경 12부 중 한 곳인 솔빈부(率濱府)의 성터였던 이곳에서 발해 멸망 당시인 926년 한민족(韓民族)인 발해 병사들과 만족(蠻族)인 거란족이 세운 요(遼, 916-1125)나라 군사들 사이에 최후의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발해 군사들은 끝까지 분투했으나 모두 산화하고 이 전투를 끝으로 2백28년 간 이어져온 발해국은 멸망한다. 

이 소식을 들은 발해의 여인들이 라즈돌나야 강 언덕에 주저앉아 자식 혹은 남편의 죽음과 나라가 멸망한 슬픔에 목 놓아 울었다. 이 때문에 오늘날까지 라즈돌나야 강은 ‘슬픈 강’, 즉 ‘수이푼(Suifun) 강’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어지고 있다고 한다. 수이픈 강을 중국에서는 본디 발해국 솔빈부의 지명을 빌어 솔빈 강(率賓江)이라 불렀었다. 

발해를 멸망시킨 요나라 거란족은 그 후로도 한반도에 세워진 고려를 여러 차례 침공했다. 1115년 아구다(阿骨打)라는 만주족(여진족) 족장이 여진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여 국호를 금(金)이라 칭하고 1125년 요나라를 멸망시켰다. 금나라는 1234년 몽고에 멸망당했다. 

그 후 조선조 때인 1616년(광해군 8년) 여진족의 족장(族長) 누르하치(奴兒哈赤)가 다시 여진족을 모아 싱징(興京·흥경) 곧 지금의 중국 라오닝성(遼寧省·요녕성) 신빈현(新賓縣)에 도읍을 정하고 후금(後金)을 세웠다. 1636년에는 그의 아들 홍타이지(皇太極)가 국호를 청(淸)으로 고친다. 1627년(인조 5년)의 정묘호란과 1636년의 병자호란(인조 14년) 은 모두 여진족인 후금과 청나라의 침략전쟁이었다.

조선의 선비이자 독립운동가 이상설의 고혼(孤魂)은 먼 옛날 위대했던 한민족(韓民族)의 고토(故土) 발해의 솔빈부 성터와 슬픈 수이푼 강가를 아직도 외롭게 떠돌며 서성이고 있을지 모른다. 이제 발해국의 찬란했던 영화도 사라지고, 독립지사들의 치열했던 의기와 그 형극의 발자취도 희미해져가고 있다. 세월은 지나가고 수이푼 강변에는 흰 꽃으로 피어난 억새만 바람에 가득하게 일렁일 뿐 슬픈 강은 나라 잃은 망명객들과 조선 유랑민들의 한(恨)과 눈물을 삼킨 채 무심하게 흘러만 간다.

▲ 수이푼 강변에 세워진 이상설 유허비.

이상설은 충북 진천군(鎭川郡) 진천읍 산척리 산직말에서 유학자 이행우(李行雨)의 장남으로 출생, 7세 때 동부승지였던 친족 이용우(李龍雨)의 양자로 입양되어 서울로 올라왔다. 본관은 경주(慶州), 어머니는 달성 서씨(達城徐氏)이다.

서울로 올라온 이상설은 이회영·이시영(李始榮,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범세(李範世·규장각 부제학, 주 러시아 대사를 지낸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의 외조부)·경기도 용인(龍仁) 출신으로 훗날 정주 오산학교(五山學校)에서 교편을 잡다가 북간도로 망명한 독립운동가 여준(呂準) 등과 죽마고우처럼 함께 어울리며 외국서적을 들여다 만국공법(萬國公法) 등 국제법과 수학·물리학·화학·경제학 등 신학문을 공부했다. 

또 미국 북감리회 목사이자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로 ‘푸른 눈의 조선독립운동가’로 불리었던 호머 헐버트(Hulbert, H. B.)박사와도 친교를 맺어 영어·프랑스어·러시아어 등을 익혔다. 헐버트 목사는 1895년 8월20일(양력 10월8일)의 을미사변(乙未0変·민비 시해사건) 이후 고종의 고문으로, 조선 국왕의 신변을 지키기 위해 아예 궁에서 거주하면서 미국 등 서방국가들과의 창구역할을 했다. 

이상설은 조선왕조 마지막 과거인 1894년(고종 31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법부협판(法部協辦)과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정2품 관직인 의정부 참찬(參贊)에 올랐다. 그가 국립대학 총장 격인 성균관 대사성에 제수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갓 스물여섯이었고 판서 급인 의정부 참찬에 올랐을 때는 서른여섯이었다. 양명학(陽明學)은 물론 서양의 신학문까지 섭렵한 이상설은 영어 불어 일본어 러시아어를 구사할 수 있었으며 ‘산술신서(算術新書)’라는 수학책을 펴내 당대 최고의 수학자로 평가받기도 했던, 다소 특이한 인물이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1905년 11월17일 을사늑약(乙巳勒約, 제2차 한일협약)을 강제 체결할 당시 대신회의의 실무 책임자인 의정부 참찬이던 이상설은 협약 체결을 막기 위해 회의장 문을 박차고 들어가려 했으나 일본 헌병의 제지로 실패했다 <계속>.

발문

이상설의 고혼(孤魂)은 한민족(韓民族)의 고토(故土) 발해의 성터와 수이푼 강가를 아직도 외롭게 떠돌며 서성이고 있을지 모른다. 수이푼 강변에는 흰 꽃으로 피어난 억새만 바람에 가득하게 일렁일 뿐 그 슬픈 강은 나라 잃은 망명객 독립운동가들과 조선 유랑민들의 한(恨)을 삼킨 채 무심하게 흘러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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