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_구글
사진출처_구글

 

안노라 <br>▲‘그림으로 만나는 서양사’인문학 강사<br>▲‘벗에게 가는 길’인문학 공간 대표<br>
안노라 
▲‘그림으로 만나는 서양사’인문학 강사
▲‘벗에게 가는 길’인문학 공간 대표

 

누군가는 이 그림을 보고 “최고의 창조적 아첨” 이라고도 하고 누군가는 “은유의 왕국‘이라고도 합니다. 조금만 상식에 벗어나도 “정신 차려!”라는 말을 듣기 일쑤인 현대인들에게는 “초현실주의의 시작”라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좀 헤프게 표현하자면 “정신 나간 그림”이라는 뜻이겠지요. 오늘은 규율과 양식에 맞춰지고 질서에 순종하는, 나름 세련되어진 우리에게 정신 나간 그림 한 점을 보여드립니다.

제목은 <봄>입니다. 제목처럼 봄을 연상시키는 온갖 꽃들이 화폭에 가득합니다. 모두 봄에 피고 자라는 꽃들이랍니다. 화사하군요. 귀는 살짝 열린 붉은 잎, 발그스레한 뺨은 장미 잎사귀 같습니다. 치아는 조로롱 은방울 꽃 이네요. 음식을 씹으면 맑은 종소리가 날까요? 몸은 온통 잎으로 뒤덮였습니다. 어깨와 팔과 가슴은 깊은 숲 한가운데 저마다의 생명으로 일어선 싱그러운 풀밭입니다. 눈빛도 미소도 꽃과 잎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화면을 보면 바로 측면 인물화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생에서 봄의 시기를 뜻하는 앳된 미소년의 모습이지요. 이 모델은 1573년 당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국의 막시밀리언 2세입니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오스트리아를 600년 동안 지배한 유럽 최대 왕실가문이었지요.

막시밀리언 2세는 호기심 많고 유연한 사고를 가진 황제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다스리는 땅에서 백성들에게 친근하게 인식되고자 했습니다. 또 군주의 덕목을 대지의 생산성과 연관시켜 자신이 다스리는 동안 풍요와 번영이 가득하고 자신이 많은 혜택을 주는 왕으로 평가받고자 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위엄과 권위를 보여주고 싶어 했던 황제로 인해 궁전에는 희귀한 동, 식물과 새로운 기계, 전 세계의 진기한 물건들이 수집되었습니다. 이를 제대로 간파한 화가가 주세페 아르침볼도(Giuseppe Arcimboldo 1527~1593)입니다.

주세페 아르침볼도는 밀라노 비아지오라는 화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밀라노 대성당의 내부 장식을 맡을 만큼 뛰어난 화가였습니다. 도도한 르네상스의 물결이 이탈리아에 밀고 왔을 때, 당시 페르디난트 1세의 초대로 합스부르크가의 궁정화가로 초빙됩니다. 그는 1573년 1월1일 황제에게 8점의 그림을 선물합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 연작과 물질을 이루는 4원소 <물>, <불>, <흙>,<공기>의 여덟 작품입니다.

새해를 여는 아침, 근엄하고 우아한 황제의 초상화를 기대했던 황실은 깜짝 놀랐지만 당사자인 황제는 파안대소 했다고 합니다. ’황제는 만물을 지배하는 자‘라는 통치이념을 재치 있는 화가가 상상력을 동원해, 개성 있게 표현한 것이었지요. 게다가 황제는 합스부르크가의 오랜 근친혼 결과로 인해 주걱턱이 심했습니다. 얼굴의 부족함을 드러내지 않고 모든 것이 왕의 은총 아래 있음을 상기시킨 통치의 철학적 이념을 함의한 이 그림은 막시밀리언 2세의 기분을 한껏 돋우게 하였습니다. “최고의 아첨”이자 동식물로서 풍요와 번영을 드러낸 “은유의 왕국”이지요.

이 그림들은 30년 종교전쟁 때, 스웨덴 군대의 약탈로 뿔뿔이 흩어져 잊혀 집니다. 그의 작품이 현대 초현실주의의 시조로 평가받는 데는 피카소와 뒤샹, 달리 등의 재해석과 놀라운 평가에 힘입었지요. 16세기, 왕족이나 종교적 성인을 그리는 관례와 전통에서 벗어나 사물의 외양만이 아니라 내면을 들여다보게 한 새로운 양식의 시도는 목숨을 담보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그는 세상과 겨룬 빅딜(big deal)에서 영원한 목숨을 보장받은 듯합니다. 곰브리치 선생님의 말씀대로 “미술은 없고 미술가가 있을 뿐이다.”란 증언의 증인으로서 말입니다.

저작권자 © 경기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