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노라&nbsp;<br>▲‘그림으로 만나는 서양사’인문학 강사<br>▲‘벗에게 가는 길’인문학 공간 대표<br>
안노라▲‘그림으로 만나는 서양사’인문학 강사▲‘벗에게 가는 길’인문학 공간 대표
그림출처 = 네이버
그림출처 = 네이버

수도하는 부처님 품으로 쫒기는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들었습니다. 이어 굶주리고 포악한 매가 들이 닥쳤지요. 그리곤 비둘기를 내어 달라고 합니다. 매는 몹시 배가 고파 먹지 않고는 날지 못한다고 합니다. 부처님은 살기 위해 품으로 들어온 것을 어찌 내어 놓을 수 있겠느냐며 대신 고픈 너를 위해 내 살을 주리라고 하셨지요.

저울 한 쪽엔 비둘기를 올려놓고 부처님의 왼쪽 허벅지 살을 떼어 놓습니다. 저울은 비둘기 쪽으로 기웁니다. 부처님의 오른쪽 허벅지 살을 떼어 올립니다. 여전히 비둘기 쪽으로 기웁니다. 계속 살을 떼어도 수평을 이루지 못하자 부처님은 자신을 모두 저울에 올립니다. 이제 수평을 이루었습니다. 살아있는 것의 모든 목숨은 단 하나 뿐임으로 그 무게는 같다고 말합니다.

아무래도 더운 여름인 듯싶습니다. 스님의 머리 위에는 무성한 나무가 있습니다. 물기 많고 굵은 붓질이네요. 힘센 햇빛을 피해 나무 그늘에 쉬어 가시려는 스님이 앞섶을 풀어 헤쳤네요. 시원한 바람이라도 불어오는 걸까요? 그런데 자세히 보니 두 손가락에 깨알같이 작은 이가 보입니다. 아마도 겨드랑이가 가려웠던 스님이 피를 빨고 있는 이를 잡으신 것 같습니다. 스님의 발치에 수북한 성긴 풀들은 마치 이가 떨어진 것 같군요. 수도자의 듬성듬성 자라난 짧은 머리와 아래로 처진 양 눈썹은 어찌할 까 고민하는 망설임이 그대로 읽혀집니다. 마음 속 깊이 생명의 무게를 저울질 하고 계실까요? 살생하지 말라는 계율이 떠 올랐을까요? 스님의 고민은 한 낮의 더위를 몰아냅니다.

이렇게 재미있는 그림을 그린 화가는 관아재 조영석(觀我劑 趙榮祏 1686~1761)입니다. 그는 숙종과 영조를 섬긴 사대부이자 화가였습니다. 파벌로 인한 잦은 사화(士禍)로 가문의 부침(浮沈)은 예측할 수 없었고, 사대부의 삶도 불안하기 그지없는 시기였습니다. 그는 강직하고 분명한 성격에 반듯한 태도를 지녔다고 합니다. 평생 몸을 낮추어 세류를 벗어나려 애썼고 청빈하고 절제된 삶을 살았습니다. (), (), ()에 능했고 특히 인물, 화조, 산수, 영모, 풍속 등 다양한 그림에 고른 수준을 보이는 뛰어난 문인화가였습니다.

특히 인물화는 1725년 유배 중인 형님 조영복을 그린 초상화가 남아 있는데 현재까지 초상화의 전범으로 불리 울 정도의 작품입니다. 정신을 드러내는 격조가 살아있으면서도 규범에 얽매이지 않는 대가의 면모를 볼 수 있지요. 영조가 그가 그린 초상화를 보고 세조의 초상화 제작에 참여하라는 왕명을 내립니다. 그는 신하와 임금 사이의 의리에도 모름지기 경중이 있는 것이라고 하며 거절합니다. 내심 그림 그리는 것은 선비가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고 의를 숭상하는 학자로서 임금도 이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 했 것 같습니다. 성리학적 사상이 투철했던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고 이 일로 파직 당합니다.

선비로서의 결기가 돌과 같았다던 조영석은 속화 14편을 모아 <사제첩>이라는 그림 모음집을 만들어 놓습니다. 표제에 남에게 보이지 말라. 범하는 자는 내 자손이 아니다라는 엄중한 경고문이 씌어져 있습니다. 왕명까지 거역한 그가 문인화도 아닌 속화를 그렸습니다. 서민에 대한 깊고 따스한 애정과 관심이 없이는 만들 수 없는 화첩입니다. 조선 백성들의 가난하고 고단한 삶은 그의 연민어린 시선 아래에서 생생하고도 객관적으로 드러납니다. 조선시대 미술사에 단원, 혜원 오원을 삼원이라 하고 겸재, 현재, 관아재를 삼재라 합니다. 능히 조선 후기 회화의 뼈대입니다.

저작권자 © 경기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