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유를 따르는 하녀
우유를 따르는 하녀 / 출처 = 구글
안노라 ▲‘그림으로 만나는 서양사’인문학 강사▲‘벗에게 가는 길’인문학 공간 대표
안노라 ▲‘그림으로 만나는 서양사’인문학 강사▲‘벗에게 가는 길’인문학 공간 대표

격자무늬의 창에서 보드랍고 차분한 빛이 떨어집니다. 빛이 스며드는 벽에는 바구니가 걸려있고 군데군데 못 자국도 보입니다. 낡고 손때가 묻어 있는 부엌이군요. 하녀는 우유를 따르고 있습니다. 고된 노동으로 단련된 탄탄한 팔뚝은 행여 우유가 넘칠까 조심스레 도자기의 배를 받치고 있습니다. 녹색 테이블 위에는 금속 주전자와 부풀려진 빵 외에는 이렇다 할 요리 재료가 없습니다. 소박하고 단출하네요. 그녀의 붉은 치마와 파란 덧치마, 광택 없는 노란 웃옷, 그리고 하얀 두건의 색채들은 질서정연하다 못해 경건함마저 풍깁니다. 세상의 소음을 거르듯, 우유를 따르는 그녀는 시간을 정지시킵니다. 적막한 공간에, 오로지 생명의 젖줄인 우유가 떨어지는 소리만 귀에 닿습니다.

<우유를 따르는 하녀>라는 요하네스 베르메르(Johannes Vermeer 1632~1675)의 작품입니다. 크기가 50cm가 되지 않는 소품이지만 17세기 네덜란드의 평범한 서민의 일상을 담담히 건져 내었습니다. 조밀하지만 잡스럽지 않고 담백하지만 무료하지 않은 이 작품을 조금 자세히 보시겠어요? 우유가 담기고 있는 황갈색 용기인 더치 오븐은 일종의 냄비입니다. 밀가루와 달걀, 우유와 다양한 재료를 더치 오븐에 섞어 구우면 맛있는 케이크가 되지요. 그림의 오른쪽 아래의 네모난 상자는 풋 워머(Foot Warmer)입니다. 상자 안에 불붙은 석탄을 넣어 열기를 내는 휴대용 난방기구의 일종입니다. 북구의 습하고 추운 날씨를 견디는데 꼭 필요한 여인들의 필수품이었습니다. 풋 워머에 발을 올리고 있거나 실내에 풋 워머가 있는 그림을 자주 볼 수 있는 것은 이 난방기구의 인기를 말해주는 것이지요.

벽의 굽도리에는 파란색 큐피트가 그려진 타일이 있습니다. 당시 칼뱅파가 다수였던 네덜란드의 시민들은 하나님이 주신 직업을 경건한 믿음의 행위로 구현했습니다. 덕분에 활발한 상공업이 이루어졌고 먼 중국으로부터 자기가 수입되었습니다. 최고의 아름다움을 자랑했던 중국의 청화자기는 선망의 대상이었지요. 이 때, 네덜란드 델프트에서 값비싼 자기 대신 청화백자 스타일의 실용적인 타일을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델프(delf)’라는 말은 그릇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지요. 세속적인 부()를 허무하게 생각하고 정직과 절제의 미덕을 실천하는 그들의 종교가 빚어낸 신중하고 소박한 문화였습니다.

네덜란드의 모나리자라고 하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작가이기도 한 베르메르에 관해서는 기록이 부족합니다. 출생년도와 세례, 연상의 카타리나 보네스와의 결혼, 11명의 자녀와 처가살이, 자신의 작품에 서명하고 팔 수 있는 자격을 얻는 델프트 화가조합에 가입했고 43세라는 이른 나이에 사망했다는 정도입니다. 화가라면 누구나 한 점 이상은 그려보는 자화상도 없습니다. 그가 유일하게 남긴 자신의 모습은 <화가의 아틀리에>에서의 뒷모습이 고작입니다. 또한 그의 작품이라고 분명하게 밝혀진 것은 30여 점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그는 렘브란트, 프란스 할스와 더불어 17세기,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화가로 꼽힙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그의 작품에서 투명하지만 투명하지 않은 빛이 느껴지지 않으세요? 대상과 지각하는 눈 사이에 고귀함이 있습니다. 그것은 드러나고 반짝거리기보다 사려 깊게 시간과 공간에 물든 감각입니다. 사물이 스스로의 이름을 말하도록 가까이 들여다보지 않고 멀리 그려보는 마음입니다. 나누고 분별하기보다 아우르고 감싸 안는 공기입니다. ‘빛의 아우라’, 덧없는 것에서 영원한 것을 꿈꾸는 베르메르의 신앙고백이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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