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구글

 

안노라 ▲‘그림으로 만나는 서양사’인문학 강사▲‘벗에게 가는 길’인문학 공간 대표
안노라 ▲‘그림으로 만나는 서양사’인문학 강사▲‘벗에게 가는 길’인문학 공간 대표

여인이 딱딱한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습니다. 온화한 표정으로 오롯이 책 읽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군요. 책을 무릎 위에 올린 채 행여 행간을 놓칠세라 왼 손 검지로 한 자 한 자 짚어가며 읽고 있네요. 등 뒤, 화조도 병풍에 있는 새는 포로롱 날거나 재재거리며 노래 부르지 못합니다. 그녀의 독서를 방해하게 될 테니까요. 하긴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있다 해도 지금, 그녀의 귀에는 닿지 않을 듯합니다. 수수한 올림머리에 동그란 얼굴, 흐르듯 부드러운 눈썹, 날 서지 않은 코, 책 내용이 흥미로운지 살짝 올라간 입 꼬리는 어느덧 그녀의 고아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옷고름 없이 허리까지 오는 넉넉한 삼회장저고리와 발목을 덮은 긴 치맛자락은 그녀가 평범한 가세(家勢)의 사대부 권솔(眷率)이거나 여염집 여인임을 보여 줍니다.

 

뒤뜰일까요? 난간 위로 시원스레 펼쳐진 파초 잎은 무더운 여름의 적막과 생기를 동시에 전해줍니다. 아마도 바느질이나 길쌈을 하는 잠깐의 틈새에 지난 밤 못다 읽은 책의 다음 장면이 몹시 궁금했을 터입니다. 밥과 음식을 차려내고 집 안팎을 단속한 뒤, 조용히 자기만의 공간을 찾아 호젓하면서도 은밀한 즐거움을 느끼고 있는 게지요. 조선시대, 단단하고 촘촘한 가부장사회가 주는 규범과 부덕(婦德)의 고달픔에도 불구하고, 지식과 상상력이 무한히 넓어지는 책으로의 여행은 멈추지 못하는 유혹이었을 것입니다. 조선 후기, 부녀자들이 집안일을 게을리 하며 소설 읽기에 몰두해 있다고 탄식한 체제공의 말은 책 읽는 여인을 권위적인 사회가 얼마나 불안하게 바라보았는지를 증언합니다. 슈테판 볼만의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는 말은 진실에 가깝습니다. 문자 안에는 다른 세계가 있으니까요. 그리고 책을 읽는 여인은 곧 자기만의 세계를 갖고 세상에 도전할 테니까요.

 

<책 읽는 여인>은 낙서 윤덕희(尹德熙, 1685~1776)가 그린 그림입니다. 윤덕희는 우리에게 초상화로 유명한 공재 윤두서(尹斗緖, 1675~1720)의 아들이지요. 위로는 고산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고조할아버지가 됩니다. 어머니는 이수광의 증손녀였으니 친가, 외가 모두 호남의 방대한 토지를 기반으로 조선후기 수많은 문인과 서화가를 배출한 학식과 재력이 있는 세도가였습니다. 하지만 윤두서를 시작으로 아들 윤덕희와 동생들은 모두 과거를 보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남인이었고, 1694년 갑술환국 때 실권하면서 관직에 나가지 않고 견문을 넓히며, 학문에 정진하는 일을 선택했습니다. 물론 유교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글 읽는 양반의 꿈은 과거를 통한 입신양명 외에는 없었을 터입니다. 그러니 과거를 보지 않았던 것이 자유로운 선택일 수는 없었겠지요. 하지만 실제로 정쟁(政爭)에서 밀린 가문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습니다. 또 그 시대, 가문을 보존하는 일은 개인의 영달보다 훨씬 중요했습니다. 종손인 윤덕희는 빈혈로 쓰러질 듯 위태로운 가문을 돌보는 일에 주력했습니다. 그리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몹시 사랑하고 존경했던 것 같습니다. 윤두서가 사대부 화가로는 드물게 풍속화를 그렸듯, 그는 문인화가에게는 볼 수 없었던 어린 아이와 여성들에 대한 작품을 남겨 놓았습니다. 작품 <공기놀이><오누이>를 보면 남루한 삶을 보듬어내는 서민들의 구순한 일상과 그것을 바라보는 그의 물기어린 시선을 느낄 수 있습니다. 책이 양반 남자만의 전유물이었던 시절, 그는 책을 읽는 여성을 그린 놀라운 화가이자, 아버지가 남긴 글과 그림과 선조들의 유적들을 정리해 후대에 남긴 고독하고 우직한 사서(司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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