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한정규
문학평론가 한정규

1906년 2월 1일 일본이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 3월 2일 이토 히로부미를 초대 통감으로 임명 식민지 탄압을 시작했다. 그에 분개한 뜻있는 한국인들이 독립을 외쳤다. 
독립운동과 관련 1910년 3월 26일 안중근의사가 뤼순 일러 감옥 형장에서 순국했다. 2023년이 그로부터 113년째 되는 해다. 
1909년 2월 7일 안중근의사가 그라스키노에서 동의단지회를 만들어 하얼빈을 중심으로 중국 동북 3성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했다.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기차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그 죄로 잡혀 재판을 받았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그의 어머니가 “너는 옳은 일을 했다. 재판을 받으면서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말라, 대의를 쫓아 죽음을 선택하라, 그게 어머니에 대한 효도다”그렇게 형에게 전하라고 중근 동생에게 말했다.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았다. 안중근의사의 어머니께서는 아들의 죽음이 목전이다. 는 말을 듣고도 흐트러지거나 비통해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아들을 자랑했다.
안중근의사는 사형선고를 받고 상급법원에 상소하지 않고 3월 26일 집행이 됐다. 그가 사형집행이 된 그해 8월 29일 조선이 일본에 병합 주권을 완전히 상실했다.
안중근의사는 순국 5분 전에 ‘위국헌신 군인본분 (爲國獻身 軍人本分)’ 나라를 위해 몸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 라는 글을 써 남겼다. 그리고 그는 두 동생에게 ‘내가 죽으면 나의 유골을 하얼빈공원 옆에 묻었다가 조국이 주권을 회복한 후 조국으로 이장하기 바란다. 나는 천국에서도 국가의 독립을 위해 노력할 것이니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알려라. 모든 사람이 국가의 중임을 지고 국민의 의무를 다하며 일심협력하여 실질적 업적을 쌓아라. 대한독립만세소리가 천국에 들릴 때 나도 춤추면서 만세를 외칠 것이다.’라고 유언을 남겼다. 그런 그는 아직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하얼빈 그곳 어딘가에서 쓸쓸히 잠들어 조국의 품을 그리워하고 있다.
그는 일제로부터 독립을 위한 노력이 국민의 의무라 했으며 독립을 위해 마음을 함께하여 협력하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천국에 가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다짐하며 애국정신을 보여줬다. 그가 서거하고 36년이 지난 1945년 8월 15일 조국이 독립했다.
그러나 이 땅에 소련공산주의와 미국이 신봉하는 자유민주주의가 동경 38도선을 사이에 두고 충돌 1950년 6월 25일 전쟁을 시작 1953년 7월 27일 휴전, 현재도 동족이 총칼을 겨누고 있다.
안중근의사가 갈망했던 조국의 독립은 분단으로 몸살을 앓고 있으며 그의 영혼은 중국에서 갈 곳을 잃고 구천을 떠돌고 있다. 그의 유언에 따라 그의 시신을 조국 땅으로 이장할 자손도 이 땅에는 없다. 
안중근의사는 1894년 그의 나이 16세 때 김아려와 결혼 장남 분도 차남 준생 그리고 딸 현생을 낳았다. 장남 분도는 일곱 살 때 일본인 첩자가 건네 준 과자를 먹고 독살됐으며 나머지 가족은 중국과 러시아에서 유랑생활을 했다.
안중근이 조국 땅에 묻어달라는 유언 헛되지 않도록 정부가 외교적 역량을 발휘 하루 빨리 그의 유해를 발굴 국내로 안치해야 한다.
그리고 중국은 그 일에 적극 도와야 한다. 그가 비록 한국인이기는 해도 민족주의를 벗어나 동양의 평화 더 나아가 인류의 안녕, 세계질서를 걱정한 사람으로 한 시대를 뛰어넘는 세계사적 인물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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