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연배와인 칼럼니스트·경영학 박사·우아한 형제들 인사총괄 임원.
변연배와인 칼럼니스트·경영학 박사·우아한 형제들 인사총괄 임원.

고려와 중국 사이의 무역은 관 주도의 조공 무역이 중심이었지만, 민간 무역도 성행했다.
원나라 시대는 육로가 주요 무역로였다. 개경에서 지금의 베이징인 대도까지는 1300㎞가 넘었다. 요동지역을 거쳐 대도는 보통 한달 반, 여름 수도인 상도까지는 한달 정도가 걸렸다. 해상으로는 중국의 산동반도에 있는 등주(지금의 옌타이 지역)와 고려의 예성강 하구에 위치한 벽란도(碧瀾渡)가 중심 항구였다.
1260~1370년까지 110년간 고려는 모두 138차례에 걸쳐 원나라에 조공을 보냈다. 원나라는 61차례 답례했다. 고려는 주로 인삼, 모시, 고급 견직물, 금, 은, 고려청자, 먹과 종이, 화문석, 나전칠기, 매, 말 등을 수출했고, 원나라로부터 와인, 차, 서적, 비단, 약재, 향료, 쌀 등을 수입했다.
와인과 소주는 고려 후기에 수입됐다(‘고려사’). 와인은 당시 중국에서 곡주의 운반에 흔히 사용된 500리터 용량의 옹기를 사용하여 육로로 들여온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에는 원 황제가 고려 왕에게 하사한 구체적인 와인의 양에 관한 언급이 딱 한번 있다. 1296년 3월 충렬왕에게 와인 2기(器)를 하사했다는 기록이다. 1기를 500리터라 하면, 1330병(750㎖)에 해당한다. 4000년전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자그로스 산맥을 넘어 남부 코카서스 지역으로부터 와인을 수입할 때 주로 1500리터 용량의 토기(크베브리)를 사용했다.
소주는 처음엔 약용으로 수입했다. 아랍이 원조인 소주의 증류법은 충렬왕 때 일본 정벌에 나선 몽골군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상류층에 급속히 퍼진 소주의 음주가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1374년 우왕 원년에는 소주 금령을 내렸다. 1376년 최영이 경상도원수 겸 도체찰사로 부임했는데, 전임 경상도원수 김진(金縝)이 부하장수들과 밤낮으로 소주를 마시고 부하를 구타하는 등 주사를 부려 사람들이 이들을 ‘소주도’(燒酒徒)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고려사, 최영 열전).
증류식 소주로 유명한 개성은 무역의 중심지였고 안동, 제주도는 당시 몽골군의 주둔지였다. 지역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불렸는데, 개경에서는 ‘아락주’라 불렸다. 지금도 아랍, 인도, 동남아, 네팔 등지에서는 술의 원료는 달라도 증류주를 ‘아락’(Arak 혹은 Araq)이라 부른다. 요즘 우리나라의 희석식 소주는 물론 증류식 소주도 ‘세번 빚을 주(酎)’자를 써 ‘燒酎’로 표기하는데, ‘燒酎’라고 쓰는 일본 소주(니혼 소츄)의 영향으로 보인다. ‘燒酒’가 맞는 표현이라 생각한다.
고대 중국에서는 발효시킨 후 거르지 않은 술은 ‘배’(醅), 두번 거른 술은 ‘발’(醱), 세번 거른 술은 ‘주’(酎), 1차 발효 후의 밑술이나 탁주는 ‘료’(醪), 한번 빚은 술을 다시 사용해 빚은 술은 ‘두’(酘), 술을 담그는 것은 ‘양’(釀)이라 구분해서 썼다.
명나라가 들어서자 태조 주원장은 외국과의 사적인 해상무역을 금지하고 농업을 장려했다. 그리고 북원과의 밀통을 우려해, 고려가 요동을 통해 육로로 교역하는 것도 금지했다. 이로 인해 고려 말기에는 중국과의 무역이 크게 위축된다. 하지만 해상이나 국경지역에서 밀무역이 성행하자 얼마 안가 금지조치가 해제됐고, 명나라와 새롭게 조공 무역이 시작됐다.
조선과 명나라 사이의 조공 무역은 조선이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었다. 조선이 조공을 보내면 명나라도 하사품을 보냈는데, 오히려 명나라에 부담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은 초기엔 금·은을 요구받아 부담이 컸으나, 세종 11년에 면제돼 한결 실리를 챙길 수가 있었다.
명나라는 애초에 3년마다 한번 조공을 하는 ‘3년 1공’을 조선에 요구했다. 하지만 조선은 스스로 1년에 4회 정기 사행을 했다. 이에 더해 행사와 절기마다 ‘별공’(別貢)이라고 해 ‘진하사’(進賀使), ‘사은사’(謝恩使), ‘진위사’(陳慰使) 등 각종 창의적인 명분을 만들어 명나라에 임시 사행단을 파견했다.
사행단의 규모도 정사, 부사, 서장관, 통역 등을 비롯해 한번에 40여명이나 됐다. 사행길에 이들이 사 무역을 하는 것도 허용했다. ‘허생전’의 모델로 알려진 일본어 역관 변승업(卞承業, 1623~1709)은 사 무역을 통해 거대한 부를 축적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조선은 1369~1398년 사이 29년간 총 99차례, 연 평균 3회 조공을 보냈다. 하지만 앞서 조선 건국 후인 1392~1450년 58년 동안에는 그 두배가 넘는 총 391회, 연 평균 7차례나 명나라에 조공을 보낸다.
하사품을 뜻하는 명나라 시대의 ‘상사품’(賞賜品) 목록에는 원나라 시대에는 있었던 와인이 빠진다. 그리고 압록강을 경계로 국경이 안정된 후, 포도만을 사용해 정통 방식으로 양조된 와인의 유통은 한반도에서 사실상 단절된다. 고려 말 이후 한동안 기록에서 와인이 보이지 않는 배경이다. 1500년대부터 와인(‘포도주’)에 대한 기록이 다시 나타나지만 정통적인 방법과는 다른 방식으로 양조한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삼국시대 이전부터 술 양조법이 존재했다. 하지만 송·원나라와 교류가 활발했던 고려시대에는 중국으로부터 각종 재료를 사용한 다양한 술 양조법이 구체적으로 문서화 된 레시피와 함께 들어온다. 고려 사람들 스스로도 창의적인 방법으로 새로운 토속주를 개발했다. 
술을 담그거나 마시는 방법에 있어서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고금을 막론하고 참 창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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