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광식 기자
유광식 기자

아주 옛날 그러니까 19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반 때 우리 동네에는 특별한 아저씨, 옥화네 아저씨가 계셨다. 
함경도에서 내려오신 아저씨는 두만강 노래만 나오면 하염없이 우시며 라디오를 끄라고 소리치는 분이셨다. 옥화는 나와 같은 해 의정부 가능초등학교를 입학했고, 집안도 5남매인 우리 집과 같았다. 아저씨는 빗자루 가게를 운영하셨다. 동네에서 제일 부자셨다. 옥화네는 무엇보다 유일하게 텔레비전이 있는 집이었다. 기억으로는 캬라멜이 5원, 라면땅이 10원하던 때였다. 
아저씨는 매주 금·토요일 저녁이면 동네 아이들에게 텔레비전을 보여주셨다. 
요금은 10원.. 이 돈이면 “어디~어디~어디에서 나왔는가.. ‘황금박쥐’”.. 만화 영화를 볼 수 있었다. 물론 비록 생김새는 무서웠지만 마음만은 따뜻한 뱀·배라·배로가 악당들을 물리치는 ‘요괴인간’도 우리들의 영웅들이었다. 
‘우주 소년 아톰’의 배경 음악은 당시 많은 이에게 또 다른 감동을 주었다. 나는 영화가 보고 싶으면 어려웠지만 아버지에게서 돈을 받아 쏜살같이 옥화네로 달려가곤 했다. 우리 형제만 5명이니까 동네 아이들까지 합하면 항상 방이 꽉 찼다. 
텔레비전 캐비닛이 열리는 순간은.. 아~뭐라고 해야 할까.. 우리들은 모두가 함성을 지를 만큼 너무나도 행복해 했었다. 영화를 보고 나면 다음 날에도 또 그 다음날에도 학교에서 다른 동네 아이들에게 자랑하기에 바빴다. 
이럴 때면 영화를 못 본 아이들은 왠지 기가 죽었지만 그래도 두 눈만은 초롱초롱 얘기를 들어주곤 했다. 한마디로 얘기하는 폼은 건방으로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사실 내게 이런 날은 그리 많지 않았다. 만화 영화를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그 10원이 없었다. 계산을 해보자면, 누나 둘과 형 그리고 나와 동생까지 합하면 우리 집은 50원이 필요했다. 하지만 엄마에게는 야단 맞을까봐 아예 돈 얘기를 하지 못했다. 
그럴 때는 서로 눈치만 보다가 속상한 마음으로 그냥 자기도 했다. 가끔 아버지가 일찍 집에 들어오시면 간절한 눈빛으로 아버지 앞에 줄을 서기도 했다. 그러면 아버지는 무슨 뜻인지 다 아시고 10원씩 주셨다. 
옥화네 아저씨는 돈 없는 아이들은 절대 텔레비전 있는 방에 들여보내지 않으셨다. 여름철 문 밖에서도 안됐다. 그래서 동네 아이들은 아저씨에게 섭섭한 마음이 좀 있었다. 아니 많았다. 
그리고 (어린 마음에..) 세월이 한참 흘러 3학년이 되었다. 친구 아이들도 이제 철(?)이 들었다. 마침 그 때 동네에서 30분 거리에 영화를 볼 수 있는 만화가게가 새로 생겼다. 
나와 동네 아이들은 이제 거래처를 옮기기로 했다. ‘우주소년 아톰’을 옥화네 말고 서비스가 더 좋은 그 가게에서 보기로 한 것이다. 앞으로는 옥화네 아저씨 집에 갈 이유가 없어졌다. 
우리 동네의 텔레비전 시청 시장구도가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생각하건대, 아마 그 이후로 아저씨의 텔레비전 입장료 사업도 내리막길을 걸었을 것이다. (중략) 50년도 훨씬 지난 지금 황해도 연백이 고향인 우리 아버지처럼 옥화네 아저씨도 진작에 돌아가셨을 것이다. 내가 진짜 어른이 된 지금.. 아저씨가 그 때 왜 그러셨을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렇게 얘기도 하고 싶다. 
“아저씨 그래도 고마웠습니다. 그 때 그렇게 모두가 어렵게 살던 시절.. 저는 아저씨 집에서 만화 영화를 보면서 꿈을 키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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