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연배와인 칼럼니스트·경영학 박사·우아한 형제들 인사총괄 임원.
변연배와인 칼럼니스트·경영학 박사·우아한 형제들 인사총괄 임원.

5000년전에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바(bar)가 존재했다. 2023년 1월 미 펜실베니아대 홀리 피트먼 교수팀은 고대 수메르의 라가시 왕국 유적에서 4700년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바를 발굴했다.
이곳에서는 ‘지어’(zeer)로 불리는 냉장고, 오븐, 점토냄비, 음식을 담는 그릇과 술 항아리도 함께 발견됐다. 안뜰과 7개의 룸, 의자와 화장실도 있었다. 맥주와 와인을 팔았던 것으로 보인다. 수메르 여인이 생계를 위해 맥주를 양조하고 바를 운영했다는 점토 기록도 있다. 당시 이미 수십 종의 맥주를 양조했고 와인은 현재의 조지아 지역에서 수입했다. 이번 발굴 이전에는 ‘카펠레이아’(Kapeleia)로 불리던 3000년전 고대 그리스 시대의 바가 기원으로 여겨졌다.
고대 그리스의 상류층은 개인 파티인 ‘심포지아’(Symposia)에 모여 철학과 예술을 논했고, 서민들은 카펠레이아에서 교류했다. ‘타베르나’(Taverna)로 불리기도 했는데, 맥주는 야만인의 술로 여겨져 주로 와인을 팔았다. 현재에도 그리스에서는 바를 타베르나로 부른다. 지금은 맥주도 판다.
고대 로마시대에도 바가 성행했다. 서기 79년 화산 폭발로 매몰된 폼페이에서는 가로 세로 2㎞ 정도의 지역에 150개의 와인 바(Thermopolia)가 들어서 있었다.
2500년전 공자가 살았던 춘추전국시대에도 술과 음식을 파는 바는 일상적이었다. 공자는 논어 향당(鄕黨) 편에서 시장에서 사온 술과 고기는 먹지 않는다고 했다. 시장에서 파는 술의 품질과 고기의 위생 상태를 믿지 못해서인 것으로 보인다. 술집이 성행한 것도 이러한 배경이 한 몫 했다.
주나라 시대에는 성을 지을 때 시장(市)을 함께 개설했다. 시장에는 여러 가지 품목을 파는 가게가 있었고 이를 ‘사’(肆)라 불렀다. 그래서 술을 별도로 파는 술집은 처음에 ‘주사’(酒肆)라 불렀다. 그 이후에는 주사(酒舍), 주로(酒壚), 주가(酒家), 주루(酒樓), 주관(酒館), 주점(酒店) 등 다양한 이름이 생겼다. 술집은 점차 숙박업을 겸하게 됐는데, 이는 서양의 바가 발전해온 과정과 다르지 않다. 지금도 중국에서는 호텔을 주루(酒樓)라 부른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호텔에 바가 있는 이유이다.
공자(孔子, BC551~479)는 술과 관련된 많은 일화와 기록을 가지고 있다. 공자가 엮은 시경(詩經) 300편 중 음주에 관한 내용은 30편이나 된다. 또 논어에는 향당(鄕黨) 편에 3번을 비롯 5번이나 술에 대한 언급이 있다.
공자의 주량에 관해서 언급한 기록도 여럿이다.
공자의 주량에 대해 최초로 언급하고 있는 문헌은 전한 때 공자의 8대손인 공부(孔鮒, BC264?~208)가 편찬한 ‘공총자’(孔叢子) 유복(儒服) 편이다. 평원군(平原君, ?~BC251)이 공자의 6대손인 자고(子高)에게 술을 권하면서 ‘요순천종(堯舜千鍾), 공자백고(孔子百觚)’라고 말했다는 일화에 나온다. 요순 임금은 술 천종을, 공자는 백고를 마셨다는 뜻이다. 평원군은 전국시대 사군자(戰國四君)의 한 사람인 조(趙)나라의 공자로, 식객을 3000명이나 거느렸다.
후한말의 공융(孔融)이 쓴 ‘여조조논주금서’(與曺操論酒禁書)에도 공자가 백고(百觚)를 마셨다고 했다. 후한의 왕충(王充)이 지은 ‘논형’(論衡)에는 ‘문왕음주천종(文王飮酒千鍾), 공자백고(孔子百觚)’라며, 요순 임금 대신 주나라 문왕(文王)을 들었으나 역시 공자의 백고를 언급했다. 명나라 장부(張溥)가 편찬한 ‘한위육조백삼가집’(漢魏六朝百三家集) 권24, 청나라 오임신(吳任臣)이 편찬한 ‘십국춘추’(十國春秋, 1699)에도 공자의 백고 이야기가 나온다.
한마디로 공자의 주량은 ’백고‘(百觚)라는 뜻이다. 종(鍾)과 고(觚)는 술을 담는 용기의 한 종류다. 그러면 천종(千鍾)과 백고(百觚)의 양은 얼마나 될까? 한나라 시대 도량형으로 1000종은 지금의 12만8000L, 100고(觚)는 40L에 해당한다. 당시 술의 알코올 농도는 10~15도 정도였다.
우선 천종은 그냥 전설로 보면 될 것 같다. 100고, 즉 40L는 750㎖ 와인 병으로 50병에 해당한다. 공자의 아버지가 거구였던 것으로 보아 공자도 체구가 컸을 것으로 보이지만, 와인 50병이라?
공자의 주량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기록도 많다. 명나라 원굉도(袁宏道)가 지은 ‘상정’(觴政)에서는 죽림칠현의 한사람인 위나라 완적(阮籍), 송나라 도연맹, 당나라 왕적(王績)과 더불어 공자를 주성(酒聖)이라 칭했고, 음군자(飮君子)라 하기도 했다. 청나라 황구연(黃九烟)의 ‘청패잡초’(淸稗雜抄)에는 요순 임금을 주제(酒帝), 삼황(三皇)의 희농(羲農)은 주황(酒皇), 주나라 문왕(文王)은 주백(酒伯), 그리고 공자는 주왕(酒王)이라 했다. 공자의 좌우에 동격으로 다만 도연명과 이백이 앉을 수 있고, 술 좀 마신다는 나머지 사람들을 이들과 비교하면 겨우 문지방에 쪼그리고 앉을 정도라 했다. 청나라 호산원(胡山源)은 ‘고금주사’(古今酒事)에서 공자를 술을 호걸스럽게 마셨다는 뜻으로 호음지사(豪飮之士)라 했다. 이와 더불어 공자는 논어 향당 편에서 직접 ‘유주무량불급란(唯酒無量不及亂, 술에 양을 두진 않지만 몸가짐이 흐트러질 정도로 마시지 않는다)고 했다
남북조 시대 북위의 고윤(高允, 390~487)은 술을 경계하는 뜻의 ‘주훈’(酒訓)에서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가 ‘일승도 마실 수 없다’(不能一升)고 한 것을 인용하여 ‘천종백고’(千鍾百觚)라는 말은 헛소리라고 일축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러 문헌을 종합해 보면 공자의 주량이 보통 사람의 수준을 훨씬 넘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소크라테스도 대주가였지만, 취해서 맑은 정신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요는 자신의 주량을 알고 제정신을 잃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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