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은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나 인체를 다스리는 일이 같은 사무라고 단언했다. 사람이 병드는 이유는 경락의 소통이 원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혈의 불통으로 표리가 막히고 음양이 혼란해지면 사람이 죽게 되는데 국가의 위기도 기강의 혼란에서 말미암는다. 올바른 것과 그렇지 못한 것들이 뒤섞이고 예법이 무너져 인륜이 사라지면 곧 국가 사직의 위망이 다가온다는 징후다. 진단은 사전에 병의 가능성(예후)을 파악하는 일이다. 좋은 정치가는 각종 국란의 무질서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어야 했다. 허준은 과거에 합격하여 국정 운영에 참여해야만 비로소 제대로 된 공공의 실천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지식인들에게 ‘의술로 사람을 살리는 일’ 또한 중요한 공공 사무임을 각인시켰다”(70쪽, ‘1장 역사 속의 허준’중에서)
허준의 의학론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역사학자 김호 서울대 교수가 펴낸 ‘허준 평전’(민음사)은 축적한 성과와 새로 밝혀진 사실들을 반영해 허준의 생애를 입체적으로 조명했다.
특히 허준을 둘러싼 오해를 걷어 내고 역사상의 실제에 더해 의학자, 자연학자, 역학자로서 허준의 면모를 부각한다. 애민과 제민 정신으로 역병에 맞서 공동체의 안녕을 구한 역학자로 허준의 일생을 바로 읽게 한다.
소설과 드라마로 형상화되어 대중에게 친숙한 허준의 이야기는 물론 더 극적이며 흥미롭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과 완전히 어긋나는 점도 많다. 서자 출신으로 내의원 의관에 봉직하며 스스로 목소리 낼 일이 거의 없었던 탓에 허준의 삶에는 사료에 남지 않은 불확실한 지점이 상당하다.
저자는 ‘양천허씨세보’와 성혼의 ‘우계집’까지 허준을 기록한 각종 자료를 치밀하게 검토하며, ‘동의보감’을 비롯해 일상의 구급을 위한 ‘언해구급방’, ‘언해두창집요’, ‘언해태산집요’, 감염병에 대응한 말년의 ‘신찬벽온방’과 ‘벽역신방’ 등 그가 편찬한 의서들의 행간에서 일생을 의학에 투신하며 지향한 바를 읽어 낸다.
“허준은 인체부터 식물과 어류 및 동물에 이르기까지 각종 약재를 향명으로 표기함으로써 당시 조선의 산천초목에 관한 지식을 정리했을뿐더러 이후 자연에 대한 깊은 이해의 토대를 마련했다. 명(名)과 실(實)의 상부 즉 조선 산천의 약재와 향명의 연결은 『동의보감』이 이룩한 가장 어려운 학문적 성취 가운데 하나였다. 『동의보감』에 수록된 수많은 약재의 한자명에 한글로 된 향명을 병기한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약재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향약으로 대체할 수 있는 약재를 굳이 중국에 가서 구입할 이유가 없었다”(141쪽 「3장 조선의 생물을 탐구하다」중에서)
노년에 이른 허준은 1612~1613년에 크게 유행한 온역과 독역에서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역병 의서 집필에 헌신했다. 칠순의 나이에도 난생처음 겪는 당독역(성홍열)을 조사하고 치료하느라 환자들의 임상과 진단을 마다하지 않았다.
역병을 여귀나 마마의 소행으로 보고 약물 치료를 피하던 시대였다. 귀신을 화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여겨 하늘에 빌거나 음식을 올릴 뿐이던 사람들에게 적극적인 치료를 권하려면 역병의 원인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과 설득의 과정이 필요했다. 또한 환자의 증세가 가벼운 단계에서 심각한 수준으로 변할 때마다 증상에 맞는 구체적이고 손쉬운 처방을 제공해야 했다.
세속의 구태와 금기에 구애되지 않고 새로운 의학 지식을 수용한 허준의 치료법은 ‘신찬벽온방’과 ‘벽역신방’으로 결실을 맺었으며, 지금의 기준으로 보아도 그 증상의 관찰과 묘사가 세밀하다. 주술이나 미신을 배제하고 정확한 진단을 강조한 그의 경험적, 합리적 태도는 후대에도 널리 칭송 받았다.
역병 유행은 한 개인의 고통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붕괴를 부르는 심각한 문제다. 역병의 극복은 환자 개인의 감염을 예방하거나 치료하는 데 머무르지 않으며 환자를 돌보는 최소 단위인 가족의 유지와 이를 넘어 향촌 공동체의 안녕이야말로 궁극의 목표였다. 허준은 바로 인술이 곧 인정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강하게 인식하고 실천한 유의였다.
1610년 조선 최고의 의서 ‘동의보감’의 편찬 작업을 완료한 허준은 ‘동의보감’의 간행(1613)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쉬지 않고 1612년과 이듬해인 1613년 발생한 온역 및 당독역의 치료법을 집필했다. 말년까지 감염병 연구에 매진한 허준은 1615년 향년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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