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혁 기자 /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씨의 국정농단 사태와 관련한 민심 수습은 뒤로 미룬 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국정 재개에 나선 모습이다. 야권의 하야·퇴진 요구와 신속한 검찰 조사에 모두 버티기로 일관하면서 사태 장기화에 대비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박 대통령은 지난달 25일 첫 대국민사과에 이어 같은달 30일과 11월3일 두 차례에 걸친 청와대 참모진 개편, 지난 2일 김병준 국무총리 후보자 지명을 비롯한 내각 개편을 단행했다. 이어 지난 4일에는 대국민담화를 통해 한번 더 고개를 숙이고 검찰 수사를 전격 수용하겠다고 약속했다.

또 지난 8일에는 국회를 전격 방문, 정세균 국회의장을 만나 김 후보자 지명을 사실상 철회하고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총리를 추천하면 임명하겠다는 약속을 내놓았다. 하지만 야3당으로부터 총리 추천 제안을 거부당하고 영수회담 논의도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해 궁지에 몰렸다.

이런 가운데 지난 12일 박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100만 촛불’까지 타올랐지만 청와대는 17일 현재까지 9일 동안 아무런 추가 민심 수습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 촛불 민심을 확인
한 박 대통령이 이번주 중으로 3차 대국민담화에 나설 것이란 전망이 나오기도 했지만 박 대통령은 검찰 조사 준비를 우선순위에 둔 모양새다.

대국민담화에서 “이번 일의 진상과 책임을 규명하는데 있어서 최대한 협조하겠다”며 수용한 검찰 조사조차도 그 시기를 두고 줄다기리를 하고 있다. 최씨와 안종범 전 정책조정수석,
정호성 전 부속비서관 등 ‘최순실 게이트’ 핵심 인물들을 오는 19~20일께 일괄기소하기로 한 검찰은 18일을 박 대통령 조사의 ‘마지노선’으로 정해 통보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이에 응하지 않을 전망이다. “대통령 관련 의혹 사항이 모두 정리되는 시점에서 조사가 이뤄지는 것이 타당하다”(대통령 법률대리인 유영하 변호사)는 게 박 대통령 측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국정농단 사태에 관련된 혐의를 받고 있는 최씨와 안 전 수석, 정 전 비서관 등에 대한 조사가 모두 끝난 뒤에야 조사에 응하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이 때문에 빨라야 이번 주말에서 다음 주 중에나 박 대통령에 대한 조사가 이뤄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야권의 하야·퇴진 요구에도 박 대통령은 버티고 있다. 야권이 임기 단축을 전제로 주장하고 있는 즉각적인 하야나 질서 있는 퇴진은 국정 중단 사태를 초래하고 헌법 정신에도 위배된다는 이유로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게 박 대통령의 생각이다.

대신 박 대통령은 여전히 국회가 추천한 책임총리에게 헌법상 권한을 모두 보장하고 여야 대표와의 영수회담으로 정국을 정상화시킨다는 로드맵을 유지하고 있다.

이처럼 박 대통령은 야권의 하야 요구나 신속한 검찰 조사에 버티기로 일관하고 있는 가운데서도 정상적인 업무 복귀에 나설 조짐을 보이고 있다.

박 대통령은 전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나 차기 미 행정부 참여가 예상되는 인사들과의 접촉을 위한 정부 고위실무대표단을 미국에 파견한 데 이어 외교부 2차관(안총기 주벨기에·유럽연합 대사) 인사를 단행했다.

이에 더해 부산 해운대 초고층 주거복합단지 엘시티(LCT) 비리 사건과 관련한 철저한 진상규명과 관련자 엄단까지 법무부에 지시했다. 국정에 대한 모든 권한을 국회 추천 총리에게 이양하라는 야권의 주장이 나오는 와중에서 외치(外治)뿐만 아니라, 내치(內治)까지 주도해나가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셈이다.

특히 엘시티 비리 사건 수사 지시는 그동안 수세에 몰렸던 박 대통령이 본격적인 대야(對野) 역공모드에 나선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엘시티 비리 사건 주범인 이영복 청안건설 회장은 천문학적인 액수의 비자금을 조성, 각종 특혜 대가로 정관계에 뇌물로 제공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문제는 이 의혹에 여당뿐만 아니라, 야당 의원들도 연루됐다는 의혹이 제기돼 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박 대통령이 의혹에 연루된 야당 인사들을 겨냥해 엘시티 비리 사건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국면전환에 나서려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사상 초유의 현직 대통령 조사를 앞두고 검찰에 자신의 국가원수 지위를 되새겨주는 일종의 시그널이란 분석도 나온다.

청와대가 이날 “대통령이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는 것처럼 의혹이 제기돼 근거 없는 의혹제기로 인한 혼란을 막기 위한 것”이라며 국면전환 비판을 반박한 것도 사실은 명분쌓기용이란 지적이다.

박 대통령이 오는 22일 예정된 국무회의를 주재할 것이란 관측도 나오고 있다. 청와대는 “들어본 바 없고 일정과 관련해서 알려드릴 것이 있으면 알려드리겠다”(정연국 대변인)는 입장이다.

그러나 황교안 총리가 박 대통령을 대신해 페루 리마에서 개최되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참석한 뒤 오는 22일 오후에 귀국할 예정이어서 박 대통령의 국무
회의 주재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는 상황이다. 대통령과 총리가 격주로 주재하며, 매주 화요일 열리던 국무회의는 박 대통령이 지난달 11일 마지막으로 개최한 이후 계속해 황 총리가 주재해 왔다. 

만일 박 대통령이 국무회의를 실제로 주재한다면 이는 국정에 다시 복귀해 정국 주도권을 되찾아오겠다는 시그널로 해석될 전망이다. 이 경우 3차 대국민담화 등 추가 민심 수습책도 배제될 공산이 크다.

저작권자 © 경기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